어느 해 한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해남의 땅끝에 갔다. 그리고 뱃길로 1시간쯤 걸리는 완도군 보길도를 찾았다.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모태가 되었던 그곳,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일 년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어부의 생활을 시인의 정서와 연결해 노래한 작품이다.
고산이 이곳에 은둔한 동기는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 때였다. 고산은 해남의 노비와 젊은이들을 모아 강화로 가는 도중에 인조가 청군의 황제에게 치욕적인 남한산성에서 城下(성하)의 盟(맹)을 했다는 비보를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로 가는 도중 마침 이곳 보길도에 들렀다가 이 섬에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고산은 보길도와 해남을 오고 가면서 우리말을 잘 부린 작품을 빗는다. 조선시대 문인으로서 고전시가, 특히 시조의 최고 경지를 이룩한 단가의 1인 자이기도 하다. 특히 그 시대에는 한문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품위가 손상된다고 여기는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시어의 조탁과 격조 있는 서정성, 그리고 예술적이고 기교적인 언어를 구사했다.
또한, 토속어 사용과 자연미의 발견 등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은 것이다. 이것은 한문학이 아닌 우리의 훈민정음을 활용해 최고 수준의 작품을 창작했다는 의미에서 우리 국문학사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조는 고려 중엽부터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조는 이미 조선 전기에 사대부 문학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왼성된 경지에 이른다. 자연 시인이라 할 만큼 자연물을 소재로한 작품이 많고 또한, 자연을 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그 자연을 통해 교훈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五友歌오우가>에서는 자연물에 인격을 부여하면서 교훈성을 시사하고 자연관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본다. <山中新曲산중신곡> 또한 고시가에서 자연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고산의 음택이 있는 해남의 금쇄동과 수정동, 그리고 <어부사시사>의 보길도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문학작품에 흐르는 자연과의 친화는 인간세계를 떠나 자연 속에 동화되고자 하는 고산의 마음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조선시대 문학이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자연을 통해 교훈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등의 강호가도를 노래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었기는 했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인데 계절별로 10수씩으로 되어있다. 윤선도가 지은 작품은 순수 창작이 아니라 세상에 전해지던 <어부사>를 윤선도는 과감하게 우리 말투로 바꾼다. 시조에서는 보기 드물게 후렴구를 사용하고 통일성을 높이면서 경쾌한 분위기를 높이고, 청유형이나 의문형 문장을 구사하여 은연중 독자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기법이 독특하다. 이러한 효과를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동화를 유도하면서 어부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 이 작품의 묘미가 아닌가 한다.
아름다운 섬 보길도,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 이 섬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어부들의 사계절 모습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한 어부사시사의 40수를 상기하면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꽃을 피워냈던 고산의 문학성을 반추하며 어부의 노 젓는 소리를 읊조려 본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於思臥) ”
이같이 시조 문학의 주옥편이라 할 수 있는 <어부사시사>를 창작했던 곳, 그리고 부용동의 세연정과 그 외 많은 건축물을 구축해놓은 이곳에서 어떤 주민의 전해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보길도 바로 앞에 있는 노화(蘆花 갈대 섬)도(지금은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연도교가 설치되어 있음)의 주민들은 그때 당시 종노(奴)자를 써서 奴花(노예 섬)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왜 그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을까? 나의 기억의 모퉁이에 메모하면서 조선 중기 신분 차별이라는 사회상을 떠 올려보았다.
보길도 예송리에는 유명한 몽돌 해수욕장이 있다. 물론 고산도 몽돌이 펼쳐진 앞바다에서 고깃배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수없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해수욕장엔 몽돌들이 온통 천년의 댕돌이 되어 누워있고, 일렁이는 파도의 화살에 과녁이 되고, 멱을 감고 있다. 그러면서 긴긴 세월 닳고 닳아가며 지문을 지우고 있다.
그래서일까 몽돌은 견뎌온 세월만큼의 경험으로 먼 곳에서 다가오는 태풍의 눈짓을 어부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다. 또한, 거친 파도와 폭풍우에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품에 안겨 그들의 숨결로 호흡했을, 그래서 맨살 맨몸이 되어도 부끄럼 없이 지금도 그 몸짓, 그 숨결로 참선하는 해변에 道 한 알 되어 누워있다. 나도 함께 누우면 한 알의 道가 되어 젖어 들 수 있을까?
몽돌
홍영수
햇살에 걸린 은빛 파도로
돌무늬에 시간의 눈금을 새기면서
얼마나 구도의 길을 걸었기에
손금 지워진 어부처럼
지문마저 지워져 반질거릴까.
낮게 임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깻돌, 콩돌, 몽돌이 되어
알몸 맨살 버무리며
철썩이는 파도의 물무늬로 미끈거릴까.
평생 누워 참선하면서
바닷소리 공양에 귀 기울이며
얼마나 잘 익은 득음을 했기에
수평선 너머 태풍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무한 고통의 탯줄을 끊은
저 작은 생명력, 그 앞에선
파도마저 차마 소리 죽여 왔다 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잘 마모되어 간다는 것.
얼마나 더 마모되어야
내 안에 몽돌 하나 키울 수 있을까.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이메일 jisra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