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것을 잊어버리기에 열중하겠다. 나의 내부에 침잠된 문화, 신념 따위에 망각을 부여함으로써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의 수정 상황에 흔쾌히 몸을 맡기겠다.
- 롤랑 바르트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져 전신마비가 되었지만, 천재적인 기억력을 갖게 된 소년 푸네스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사고가 난 후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이 거의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너무 풍요롭고, 너무 예민하게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지각력과 기억력은 완벽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본 숲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모든 나무들의 모든 나뭇잎들뿐 아니라 그가 그것들을 지각했거나 그것들을 다시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까지도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고 일반화, 개념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기억에 시달리다 결국 요절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기억 이상으로 망각이 중요했던 것이다. 인간은 기억과 망각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간다. 그래서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세계다.
보르헤스의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동물을 분류하고 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털로 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동물. 물 주전자를 깨뜨린 동물.’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이러한 동물 분류법을 보고 말했다. “지금까지 간직해온 나의 사고, 즉 우리 시대와 풍토를 각인해주는 우리 자신의 사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세상이 동물을 분류하는 방식을 알고 있다. 포유류, 양서류, 조류, 어류 등. 이런 분류법은 인간을 동물의 정점에 놓게 된다. 이런 분류법을 공부한 우리는 인간중심의 사고를 하게 된다. 다른 동물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상하게 된다. 푸코는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서 본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사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분류법’을.
근대의 인간중심의 사고는 자연과 인간을 황폐화시켜 전 인류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인간이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하여 삼라만상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삼라만상은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 세계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도 각자 하나의 세계가 되어 대동세상(大同世上),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뤄가야 한다.
우리의 학교 교육은 공부 위주로 서열화 되어 있다. 언젠가부터 학교에 ‘일진’이 생겨났다. 그들은 공부가 아닌 힘에 의해 서열을 재배치했다. 학교가 공부 위주의 서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여러 다양한 분류법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등장할 것이다.
나는 직장이라는 조직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다. 맞춰 살다 결국엔 튕겨져 나오게 되었다. 오랜 방황 끝에 알았다. 나는 ‘돈키호테’라는 것을. 그 후 나는 타고난 성격대로 살아갔다.
나도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다른 사람들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느 한 분류법으로 인간을 통제하면, 그 사회는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각자의 성격대로 살아가야 한다.
기억과 망각을 통해 자신만의 분류법을 창안해 가야 한다. 큰 전쟁은 많이 사라졌으나, 지구 곳곳에 테러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세상의 분류법으로 살아가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때 그 잎새
슬픔이 지나간 자리마다
숭숭 뚫리는 비릿한 구멍들
망각의 못 박을 일이다
〔......〕
내 영혼의 팔랑개비여 돌아라
바람 없는 날이라도 부디
가벼웁게 살 수 있도록
- 박라연, <상처> 부분
우리가 상처를 잊지 못하는 건, 상처를 준 세상의 분류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팔랑개비가 잘 돌아가게 하는 분류법을 발명해내야 한다. 그러면 상처는 사라진다.
오랫동안 내 몸은 가난의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나의 삶을 찾아가며 그 상처들이 내 생(生)을 밀고 가는 거름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