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끝 무렵이다. 이제부터 무더위의 기승을 견뎌야 한다. 이럴 땐 대청마루에서 목침(木枕)을 베고 낮잠을 즐기는 멋과 지하수를 뽑아 올린 우물가에서 물 한 바가지로 등목하는 상쾌함과 죽부인을 껴안고 바람 잘든 마루 끝에서 드러누워 바람의 귓속말을 듣는 맛을 상상해 본다. 지금은 도시나 시골 어디를 가도 에어컨과 선풍기가 있어 땀을 식히고 잠시 더위를 피할 수 있다. 그러면 옛사람들의 피서 방법은 어떠했을까?
가장 먼저 탁족(濯足)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탁족은 예로부터 선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즐겨 했던 피서법이다.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잊는 피서법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피서법이다. 지금은 전자제품이라는 기계문명의 혜택들 받으며 버튼 하나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준다. 그러나 그것은 몸에 나는 땀방울을 식혀줄 뿐, 그 어떤 감흥이니 여미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탁족은 더위를 식히면서 계곡에 흐른 물소리와 숲속의 새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나뭇가지 흔들리는 풍경을 함께 즐기는 여유와 넉넉함에서 운치 있는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다. 다산 정약용도 소서팔사(消暑八事)의 더위를 식히는 여덟 가지 방법 중에 달빛에 젖어 물가에서 하는 월야탁족(月夜濯足)을 예찬한 바 있지 않던가.
조선 중기 화가 이경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를 보면 선비 차림의 노인이 물에 발을 담그고서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허벅지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의관(衣冠)은 단정하다.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은 듯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있다. 시원한 계곡에서 어찌 한잔 술이 빠지겠는가. 동자가 건넨 한잔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화면의 여백처럼 여유와 유유자적함으로 한 여름 더위를 물리치고 있다.
탁족 하는 선비의 모습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피해 초연히 사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는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修身”의 의미를 음미하며 自適하는 고매한 선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아리에 휘감아 도는 물살에 부딪혀 세속의 찌든 때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떠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선비들이 탁족지유(濯足之遊)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의 고전 초사<楚辭>의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초사의 「어부사」를 보면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즉,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漁父歌’, 또는 ‘滄浪歌’라 부르며 ‘濯足’과 ‘濯纓’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로 부여했다. 이처럼 ‘창랑가(滄浪歌)가 담고 있는 의미를 맹자는 모든 일은 자기 처신하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각자의 수신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고 탁영탁족(濯纓濯足)의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부가 굴원(屈原)에게 권하는 “濯纓濯足”의 의미는 時勢에 따라서 자연 그대로 처세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道가 행해지는 좋은 세상을 뜻하는 것이고,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의관(衣冠)을 갖추어 조정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반대로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뜻하며 발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산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어부사」에서의 “탁족”은 은둔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修身’ 혹은, 세속을 초탈한 ‘은둔(隱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탁족’은 중국에서는 여러 문학작품에서 많이 인용되고 사대부들의 생활양식의 한 부분이기도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의 창덕궁에 가면 처마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모습의 부용정(芙蓉亭)을 볼 수있다. 그것은 활짝 핀 연꽃을 의미하기에 정자의 이름에 걸맞게 한 것이다. 그냥 스치면서 보지 말고 가까이 아님, 멀리서 이 부용정을 보면 두 개의 주춧돌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다. 이 또한 굴원의 「어부사」에서 뜻과 의미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를 떠나 건축가 가우디처럼 자연을 표현주의적으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건축은 자연이 성립하게 큼 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기능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모습의 자연적인 표정을 짓게 해서 시적인 공간으로 만든 후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건축상을 지향했다. 부용정 또한, 이러한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창문 밖에서 햇볕이 따갑다. 코로나19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솟구치고 고물가의 생활 속에 지치고 힘들수록 마음을 잘 잘 추스르자.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여유롭게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어울렁더울렁 몰려다니는 시간 말고 혼자만의 시간 속에 침잠해보자. 명상도 좋지만, 시원한 계곡에서 여유를 가지고 탁족하고 마음마저 씻어보자(洗心)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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