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완당과 완당 바람 – 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들”의 서울 동산방 화랑의 전시회를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추사와 초의, 그리고 소치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을 두 번 답사 했다. 추사에 대해 느낀 점들은 지금까지 마음에 간직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인 ‘명선茗禪’, ‘불이선란不二禪蘭’그리고 ‘세한도歲寒圖’의 영인본은 책장에 간직하고 있다.
차는 근본적으로 禪 수행과 융합되어 발전했으며 선불교 문화의 대표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추사가 정성스럽게 쓴 ‘茗禪’은 초의 차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이 담겨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2004년, 약 200년 뒤의 일이다. 다산의 애제자 황상의 ‘걸명시’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차와 禪은 일치한다는 의미의‘茗禪’은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號라는 것도 밝혀졌다. 차를 좋아한 추사가 초의에게 걸명(乞茗)의 편지를 써 보낸 것을 보면 초의 선사 차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초의 선사는 “물은 차의 체(體)이고, 차는 물의 용(用)이다”라고 했다. 차는 물을 통해 차의 진수를 드러내고 또한. 차는 물에 의해 차의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쩜, 이것은 불교의 體用論에 빗댄 스님다운 얘기가 아닌가 싶다.
이곳 대흥사의 일지암에서 초의 선사가 동다송(東茶頌>에서 ―‘東茶頌’의 초기의 표제는 ‘동다행東茶行’이었다고 한다.“ ― “중국 육안(陸安)의 차는 맛으로 월등하고 몽정산(夢頂山)의 차는 약효가 높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차는 그 두 가지를 겸비하였다.”고 한다. 우리 차의 우수성을 얘기한 것이다.‘다성茶聖’으로 일컫는 초의가 주석한 일지암은 한마디로 ‘한국 차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의의 한국 전통차의 맥을 이어가는 곳을 우연히 알게 되어 방문하게 되었다.
저 남녘의 끝자락, 대흥사를 머리에 이고 일지암을 옆구리에 차고서 신선들이 춤추는 무선동(舞仙洞)에 자리를 잡은 전통한옥인‘새금다정자塞琴茶亭子’이다. 몇 번 방문했지만, 정성과 혼을 다해 차(茶)를 내 몸처럼 다루듯 하면 육체와 정신에 배어든 낯빛도 차를 닮아가는 것일까. 이곳의 주인장, ‘(람원(藍園) 윤향자’님 자체가 다도이고 다신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들른 방문객에게 조주선사라도 되는 듯 “끽다거(喫茶去),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라고 한다.
‘람원’님의 찻물 끓는 소리는 ‘새금다정자’뒤안, 대숲의 바람 소리 같고 그 소리는 홍진의 찌든 때를 씻어내는 것 같다. 정갈한 장독대에 잠든 간장 된장까지도 선에 든 듯 차분하다. 다관을 헹굴 때의 정갈함에 정적이 정적을 베고 누운듯 하고, 찻잎이 다관으로 들어갈 때는 저 건너 대흥사 새벽 범종의 맥놀이를 닮은 듯 은은하다.
해남의 옛 지명(새금塞琴)을 차용한‘새금다정자’에는 고산과, 다산, 추사, 그리고 초의가 수시로 들명날명한다. 굼깊은 한듬절(대흥사)의 독경 소리에 무선동의 신선들이 다향에 젖어 옷깃을 여밀기도 하고, 달빛이 고봉으로 내리는 밤에는 일지암에서 동다송을 꼴마리에 찬 초의가 내려오고, 초당의 다산이 약천의 찻물을 안고 깔끄막의 우슬재를 넘어와 다정에 앉을 무렵, 누군가 새팍 여는 소리가 난다. 저 먼 탐라의 세한도 소낭구 아래 홀로 외로운 추사가 아슴찮게 명선차를 가져왔다. 이것을 안 고산 윤선도는 멜겁시 세연정 원림에 앉아있다가 뜬금없이 일어나 무선동 이곳 ‘새금다정자’를 찾는다.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눈엽을 솎은 람원은 첫물차를 지을 수밖에.
람원은 네 분의 찻잔에 한 번에 채우지 않고 옮겨가며 따른다. 차별 없는 다도의 정신이다. 한 참의 시간이 지나면서 色과 香, 氣와 味의 원융함이 현현한다.
초의선사가 거주했던 일지암과 ‘새금다정자’와는 가까운 거리다. 그리고 람원은 이곳에서 자라고, 학교 다녔다. 또한, 차에 대한 꾸준한 노력과 관심을 가진 끝에 다도 대학까지 마쳤다.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리처드 도킨스 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한 “밈(MEME)”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 이유는 “밈”이 비유전적인 방법, 특히 모방을 통해 전해지는 문화적 요소라고 할 때 밈은 스스로 복제하고 널리 전파한다. 그러면서 진화한다는 점에서 생물의 유전자와 닮은 점이 많다. 이러한 전파는 밈에 의한 복제과정을 거치면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새금다정자‘에서 전통차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초의로부터 내려오는 차 문화와 사상적 배경 등, 문화적 유전자인 ‘밈’라는 개념으로 다소 거칠지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사와 다산을 정수로 삼고 초의를 뼈대로 삼는‘새금다정자’, 그래서 눈여겨보고 방문해 볼 이유이기도 하다.
“새금다정자塞琴茶亭子” 한옥의 다실에서 보았던 선시가 생각난다.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靜坐處茶半香初 (정좌처다반향초)
妙用時水流花開 (묘용시수류화개)
대흥사 숲길
홍영수
숲길에 들어서면
달짝지근한 숲 향, 귀 고막을 울리는 새소리에
취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
나를 버리고 숲의 숲이 되어야
비로소 참나로 깨어나게 하는 숲
아홉 굽이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휘어잡고서
바람은 일필휘지로 골짜기를 가르고
명지바람에 다디단 숲 냄새가
발묵 스르륵 나뭇가지로 번질 무렵
이파리 사이로 보인
구름 화선지 가녘으로 항적운이 스민다.
걸음걸음 위에 화두처럼 툭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깨닫지 못한 심연에 물음표가 되어
구새 먹은 얼혼을 깨우고
영육에 슬어놓았던 먼지 알갱이들
시냇물에 씻어 보내며
주렁주렁 매단 산새들의 음표 데려다 놓고
솜털 구름 베개 삼아 실카장 눕는다.
깜박 든 풋잠, 깨어보니
일지암의 다향이
코끝을 스친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이메일 jisra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