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둘러싼 어둠 속에서의 움직임. 지척 어딘가에선 아직 잠들지 않은 새가 뒤척이고, 물은 계곡을 돌고 돌아 흐르고 있다. 밤이 되면서 생각은 끊임없이 샘솟았다. 시간을 따라 의식이 흐르는 것인지, 시간과 의식이 겉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은 멈추지 못하고 굽이진 계곡을 따라 흐른다. 의식은 흐르면서 중심을 향한다. 문명에 길든 존재가 자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겉도는 동안, 그렇게 흘렀다.
어둠 속 야성의 본능만이 번뜩이는 시간. 숲은 적막하고, 잠들지 못하는 새가 이따금 외마디 소리를 내면 어둠조차 숨을 죽였다. 지치지 않는 것은 물뿐이다. 산새와 오소리와 이름 모를 들짐승, 모두가 무의식 한편에 경계를 풀지 못하고 어설픈 잠을 청하고 있다. 천근만근 일상에 찌든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지친 심신을 풀어 놓았을 것이다. 그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의식에 무엇인가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모습. 눈은 반짝거리고 있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나를 지켜보다 물소리를 따라 사라졌다. 물의 끊임없는 흐름처럼 도심에서도 숲속에서도 내게서 떠난 적이 없다. 두 눈을 반짝거리는 여우. 백두산 숲속에서도 접경지 숲에서도 한밤에 나를 찾아와 말없이 지켜보다가 떠나간다.
자연에 내재한 생명력을 노래한 테드 휴즈(Ted Hughes)가 생각났다. 그는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은 지나친 이성적 사고로 인해 본연의 생명력을 상실함으로써 본연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으므로, 건강한 생명력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주창하였던 시인이다. 그런 생명력의 추구에 있어서 어둠 또한 우리의 고향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어머니의 자궁이 인간존재의 고향이고, 더 멀리는 아득한 시간 속 은하계와 태양계. 그리고 어둠 속 우주 빅뱅을 통해 형성된 태양과 지구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 형성되어 점차 진화된 존재이므로, 궁극적으로 어둠은 우리의 고향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일 것이다. 그러기에 잠시나마 어둠이라는 고향을 접하고, 문명 속에서 엉킨 삶의 타래를 풀기에 숲만큼 좋은 장소도 없을 것이다. 물이 없어도 숲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물이 있다면 숲은 더 좋을 것이다. 다시금 소로우(H. D. Thoreau)의 월든(Walden) 숲으로의 여행이 얼마나 경이로웠을까를 생각해본다.
어둠의 질서는 영혼을 결박하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원시적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동안 세상이 너무 밝았던 것은 아닐까. 전에 알고 지내던 한 외국인 친구는 자기 고향이 자꾸만 밝아져서 한국으로 왔는데, 서울 같은 대도시보다도 지방의 중, 소도시가 오히려 지내기에 적합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오래전 스치듯 지나가며 하루를 묵었던 캐나다 오타와가 그녀의 고향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 어설픈 잠을 깬 아침 거리에 한 부랑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도시의 새벽안개는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고, 노숙자를 보며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한 중소도시처럼 작아 보이는 도시가 한 국가의 수도라는 사실이 당시에는 믿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생각은 바뀌는 것인가. 한 나라의 수도가 커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편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빛은 선이고 어둠은 악”이라는 인식 또한 하나의 편견 아니겠는가. 지금, 여기 지방의 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자연은 얼마든지 곁에 있고, 어둠은 바로 곁에 존재한다.
숲에서의 하루를 보내며 소로우를 떠올린다. 잘 나가던 젊은 하버드대생이 최고의 대학 생활을 접고 월든 호숫가로 훌쩍 떠나갈 때 얼마나 말이 많았겠는가 (물론, 그는 말없이 그 일을 실행했을 것이다). 그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몸으로 자연을 접하고 느끼는 일은 그 당시의 미국 도시민에게도 충격적이고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로우는 자신이 생각한 것, 느끼고 싶은 것을 몸소 실행했다. 보편적 관례와 관념적 사고를 넘어서는 일을 과감히 실행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의 사고(思考),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 질서를 과감히 깨고, 실천적 지식인의 행동을 보여준 선구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의 삶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더 짙어간다. 알게 모르게 일률적인 사고를 강요받고,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지는 않는가. 수많은 법을 따라야 하고, 법은 수많은 가지를 치며, 인간존재는 관념과 도덕과 관례의 울타리 안에서 행동해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효율성을 우선시할 때 창의성과 상상력을 배제해야만 한다. 빛의 측면이 아니라 어둠의 시각에서 본다면,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상상력을 펼쳤던 인간존재는 문명에 길들어 어둠의 생명력을 상실해간다. 감성과 독창성과 상상력을 상실하고, 빛의 편리함과 안락함과 안전함에 의존하게 되었다.
숲에서의 하루는 헝클어진 질서를 인식하게 해주었다. 어둠과 빛이 전도된 문명사회에서의 진화. 그것은 안전하고 편안하며 정형화된 삶이었다. 문서로 기록되고, 빛으로 이성화된 지성이었다. 숲에서 나는 야생의 소리를 듣고, 정형화되지 않는 물의 길들지 않음을 본다. 제각각이지만 어우러져 야성을 키워가는 초목의 본질과 사계를 묵묵히 견디는 지고한 자연의 순리를 보았다.
숲에서의 하루는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시간을 뒤로 물리고, 경계선 밖의 낯선 질문을 내게 던진다. 잊었던 물음에, 나는 다시 돌아와서, 답할 것이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imilt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