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
- 수전 손택
어제 저녁 강의 시간에는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눴다. 인간은 공감의 능력을 타고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
바로 ‘사물’이 되어서 그렇다. 우리는 자라면서 너무나 많은 폭력을 당하며 살아와 사물이 되어 버렸다. 사물은 각자 개별적으로 어떤 수단으로 존재한다. 의자는 앉는 용도다. 용도를 다하지 못하는 의자는 폐기처분된다.
신발이 낡으면 버린다. 왜? 신을 수 없으니까? 그럼 인간은?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인간은? 우리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직원은 당연히 해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물이 되어서 그렇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폭력을 그리도 많이 당해 사물이 되어버렸을까? 크게 보면 자라는 과정이 사물화의 과정이다. 어릴 적 부모 밑에서 자라며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간다. ‘착한 아이’ ‘아들’ ‘딸’ ‘장남’ ‘장녀’ ‘학생’ ‘공부 잘하는 아이’ ‘공부 못하는 아이’ ...... 이 모든 게 사물이 아닌가?
인간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이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한한 신비스러운 존재다.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어떤 인간’으로 길러진다.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의 아름으로.
어떤 형태가 된 인간, 사물은 어떤 수단으로 쓰이게 된다.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그 아들은 어떻게 되는가? 학생답지 못한 학생은? 여자답지 못한 여자는? 우리는 인간을 그냥 인간으로 대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이 사물이 되게 하는 마법은 언어의 작용이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한다. 어떤 언어를 익히게 되면 그 언어는 명령을 내린다. 공부라는 언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불러일으킨다. 남자라는 언어에는 남자답게 살라는 채찍이 있다.
‘아파트’라는 언어에는 다세대주택, 빌라를 멸시하는 눈이 있다. 삼라만상에 언어가 붙게 되면서 삼라만상은 신비를 잃어버린다. 사물도 원래 어떤 수단이 되는 사물이 아니다. 아이의 눈으로 보면 의자도 의자가 아니다.
부서진 의자도 아이들의 손이 닿으면 마법이 일어난다. 인간과 사물, 모두 언어가 붙기 이전에는 신비스러운 존재였다. 언어가 붙으면서 인간과 사물은 수단이 되어간다. 인간이 사물을 벗어나 인간이 되면 사물도 생생한 생명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다 고귀한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생생하게 숨 쉬는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지금도 지구 곳곳에는 고귀한 존재로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이 있다.
그들의 삶에는 수단이 되는 것은 없다. 다 그대로 고결하다. 고흐의 ‘구두’라는 작품에서는 낡은 구두 한 켤레가 고결한 광휘를 내뿜는다. 고흐의 고매한 영혼이 구두를 사물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했다. 낡은 구두 한 켤레, 그 구두는 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무심히 바라보면 모든 사물이 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언어만 내려놓으면 삼라만상은 마법을 일으킨다. 이때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와 삼라만상은 하나이니까.
모두의 눈동자는
마법의 항아리야.
탱자나무 울타리도
길거리도, 마차도, 말도,
마부도,
메밀밭도
오동나무도,
〔......〕
자그맣게 되어
모두 들어간다.
- 가네꼬 미스즈, <눈동자> 부분
시인은 자신의 눈동자로 우주가 다 들어가는 신비를 체험한다. 시인이 눈동자라는 언어에 갇혀 있었다면, 이런 신비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어를 깨버려야 세상의 신비가 드러난다. ‘모래 한 알에 우주가 있고, 꽃 한 송이에 천국이 있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