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소나기는 거침없기에 통쾌하다. 하늘이 뽀얗게 변하는 시공간은 오직 자연의 색으로만 빚은 신비의 장소. 굵은 빗줄기의 소나기는 망각의 기억을 되살리거나 존재의 기억을 새기므로 장엄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하다. 그친 뒤로는 군말이 없기에 더없이 개운하다. 불볕더위에 지쳐 여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가도, 장대비를 맞으면 잊었던 계절이 생각난다.
열기에 지쳐 기억할 수 없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계절이 가고 있다. 폭염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던 시간은 종국엔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 계절은 마음에도, 기억에도 남지 않으니, 잃어버린 계절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들판의 곡식은 옹골차게 알곡을 다지며, 초목은 더욱더 굵은 가지를 만들고, 아이들 뼈마디는 한층 굵어졌을 것이다. 잃어버린 계절은 잠시 잊어버린 계절이었지만, 결코 잃어버린 계절은 아니었다.
누군가와의 기억은 계절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존재는 기억에서 잊히고, 계절을 따라 기억에서 살아난다. 더운 여름 꿈속에서도 지친 때, 땀을 한껏 쏟고 잠든 밤에 장대비가 내렸다.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한기(寒氣)가 배어들고, 밤은 이내 외로워진다. 꿈은 기억을 부르고, 그제야 “또 한 계절이 흐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눈 깜짝할 새에 팔월(八月)을 달리고 있으니, 여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달려와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다.
뜨거운 여름 입안에서 환하게 퍼지는 음식이 있다. 음료수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정식 음식의 범주에 넣기도 모호한 것이, 그 향만큼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달곰한 과즙 또는 달달한 설탕물에 수박, 복숭아, 기타 과일을 곁들여 꽁꽁 언 얼음을 띄워 먹으면 여름의 더위를 한껏 날려 보낼 수 있다. 이번 여름처럼 불볕더위가 쏟아질 땐 꽉 조인 단추를 풀고 시원하게 들이켜는 화채가 그립다. ‘화채’. 이름 그대로 화한 식음료. 어머니가 내어놓으시던 화채와 쌍벽을 이루는 음식이 하나 더 있다. 땀을 잔뜩 흘렸을 때, 몸 안 깊이 들어와 데워진 위를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오이지의 깊은 맛은 일품이었다. 이제는 더 맛볼 수 없는 그리운 맛이지만.
그런 여름은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이자 반면 아버지와 관련된 계절은 한겨울이다. 꽁꽁 언 북한강에서 수십 명이 아버지를 따라 아이스 링크를 회전하며 천연의 빙판을 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어린 철부지가 커다란 얼음구멍 옆에 스케이트를 가지런히 놓고, 그 먼 길을 찾아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그날 집에 돌아온 뒤의 일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뭐, 맞을 짓을 하고도 남을 것이니). 그런 아버지는 지금 가까이, 어머니는 아주 멀리 계시지 않은가.
지금쯤 선산(先山)에 풀이 무성할 것이다. 풀들은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도 잘 자라니, 그 무한한 생명력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자비한 번식력에 진저리가 날 수 밖에. 우리 삶은 기억의 덩어리. 지나고 보면 삶엔 기억만 남는다. 지나온 길은 희미해져 종국엔 기억에서조차 아득해지지만, 기억의 봇물은 한순간에 몰아쳐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 장맛비가 지나면, 한껏 휴식을 취한 태양이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 빗물 같은 기억을 흘리면서, 눈물 같은 땀방울을 떨구면서, 예초기로 무덤가 풀 한 포기 한 포기를 자를 것이다. 미(美)와 진(眞)이 온전한 생을 이루는 곳으로의 짧은 여행을 생각한다.
끊임없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하는 자, 누구인가. 새 날아오르듯 풀은 솟아오르고, 무덤가에 웃자란 덤불은 손길을 기다린다.
무덤 속의 대화
- 미(美)와 진(眞)-
나는 미(美)로 인해 죽었다-
무덤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외로워하던
어느 날, 진리를 추구하던 이가
옆에 와서 묻혔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왜 실패했을까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미 때문인데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진(眞) 때문이고, 그 둘은 하나이니
그럼 우린 친구로군요”
그 후로, 동족으로서, 밤마다-
우린 나란히 누워 얘길 나눴다-
이끼가 우리 입을 덮고-
이름을 가릴 때까지-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살아서 이룰 수 없는 두 진리, 미(美)와 진(眞). 아름다움에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진리이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으니, 미와 진이 완성되는 시간.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의해 패배하는 자, 운명 지어진 울타리 안에서 살고 죽고 또 태어난다. 한 여름 초목이 눈부시다.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무거운 중력이 오늘을 휘감는 가운데, 중력을 이기려는 부단한 몸짓이 팔월 햇살을 이고 푸른 들판에 시리도록 퍼져갈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