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에 대하여
무내숙니(武內宿禰)는 『일본서기』에 많이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타케우치노스쿠네(たけうちのすくね)”라 하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한글역주본 『일본서기』에서는 “무내숙녜”라 하지만, 필자는 “무내숙니”라 칭하기로 하겠다. 한자 禰가 한국어에서 ‘녜’ 혹은 ‘니’라 읽히는데, 필자는 [니]가 본래의 이름에 더 가깝다고 보아 “녜”라 읽지 않고 “니”라 읽기로 하였다.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차자표기와 ‘임나(任那)’라는 국명에 대한 것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임나(任那)’라는 국명은 옛날 사람들이 ‘너른 곳 중에서 으뜸가는 곳’이란 뜻에서 [ᄆᆞᆮᄂᆞᆯ/mot-nor]이라 일컬었던 말을 ‘사음훈차+음차’한 표기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맡라] 정도로 일컬었던 국명을 한자로 ‘任那’라 차자하여 적었다는 말이다. 한자 那는 [ᄂᆞ]를 음차한 표기이고 한자 任(맡을 임)은 [맏]과 비슷한 음을 가진 말 [맡]에 해당하는 한자라는 점에 착안하여 차용한 표기로 필자는 그러한 차자방식을 ‘사음훈차(似音訓借)’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任那’라는 표기는 당시 사람들이 [맡나]라 일컬었던 국명을 ‘사음훈차+음차’하여 적은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차자방식을 달리하거나 다른 한자를 빌려서 적는다면, ‘萬盧(만로)’나 ‘馬老(마로)’, ‘晞陽(희양)’이라 적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임나국(任那國)’은 현 큐슈 북단의 마츠우라시(松浦市)에 있었던 고대국가 ‘말로국(末盧國)’,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었던 고대국가 ‘만로국(萬盧國)’과도 동일한 국명이라 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보이는 ‘응유(鷹遊)’, 『제왕운기』에 보이는 ‘응준(鷹準)’, 『양직공도』에 보이는 ‘전라(前羅)’, 『일본서기』 신공기에 보이는 ‘매두라(梅豆羅)’와도 동일한 국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한국측의 문헌에는 ‘모로(芼老)’, ‘목라(木羅)’, ‘木出(목출)’, ‘木生(목생)’이라고 차자하여 기록되었을 수도 있으며, 일본측의 문헌에는 ‘모루(牟婁)’, ‘모야(毛野)’, ‘기각(紀角)’, ‘기소궁(紀小弓)’, ‘물(物)’ ‘기생(奇生)’ 등으로 차자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의 ‘무내(武內)’ 역시 [muno]를 음차한 표기로, 물부련(物部連)의 ‘物(물; mono)’과 같이 ‘임나국, 임나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무내숙니의 ‘武內’는 무내숙니라는 인물이 임나지역 출신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거나 임나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말이다.
중간정리를 하자면,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은 [muno-soni]라 일컬었던 이름을 차자한 표기로 이름에서부터 임나지역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거나 임나지역의 통치자 혹은 실권자라는 걸 나타내고 있으며, 그 이름만 놓고 보면 『일본서기』 계체천황 9년(서기 512년) 2월조에 백제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과 함께 나오는 ‘물부련(物部連; 모노노베노무라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는 얘기이다.
‘乙素(을소), 乙巴素(을파소), 孟召(맹소), 古陀炤(고타소), 亡所伊(망소이)’ 같은 고대 한국인의 인명에 많이 보이는 접미사 [-소/-쇠]와 같은 [-소이/-손이]를 임나인들이 한자로 음차하여 적은 것이 ‘宿禰(숙니)’인 것이다. 고구려 淵蓋蘇文(연개소문)의 이름을 ‘[蓋金(개금)’이라고도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로 하면 당시 사람들의 발음에서 [-소/-소이/-손이/-솜이] 등의 발음이 혼용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라 화랑 죽지랑(竹旨郞)의 이름을 ‘竹曼(죽만)’이라고도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사람들의 발음에서 [ᄆᆞᆯ/ᄆᆞᆮ/ᄆᆞᆺ/ᄆᆞᆫ...]의 음이 오락가락 넘나들었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고대한국인의 인명에서라면 ‘첫째 가는 인물, 으뜸 가는 인물’이라는 뜻의 [맏소/만쇠] 정도로 부르는 이름을 “武內宿禰(무내숙니)”라고 차자하여 적은 것이라 할 수도 있젰지만, 필자는 무내숙니의 앞부분 ‘武內(무내)’가 ‘末盧國(=任那國)’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이 ‘武內(무내)’를 일본어에서 다른 한자로 적는다면 ‘宗(종; むね)’이나 ‘棟(동; むね)’ 등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마도 일대에는 宗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宗씨 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의 무내(武內)는 임나(任那)의 본래 국명인 [ᄆᆞᇀᄂᆞ/mot-nor]를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무내숙니가 임나지역 출신이거나 임나지역의 통치자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한국에서라면 [말쇠/맏쇠/만쇠/망쇠...] 등으로 발현되고 ‘末金, 莫金, 萬金, 亡金’ 등으로 표기가 되었을 이름들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런데 무내숙니는 언제 활동했던 사람일까? 고대의 기록자들이 꾸며낸 가상의 인물일까, 아니면 실존했던 인물일까?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들 중에서 초창기 천황들은 대부분 실존 가능성이 낮고 후대의 기록자들에 의해 가공된 상상속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초창기 천황들과 무내숙니 같은 인물들이 실존했을 가능성이 아주 낮은 허구의 인물로 보아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전의 다른 글에서 논한 바와 같이 실존했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이 실존했던 시기는 서기 500년대로 본다. 필자는 종래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2갑자 수정설’이라는 것을 전혀 신뢰하지 않으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도를 120년 끌어내려 역사적 사실에 억지로 꿰맞추려는 주장과 노력들을 한심하기 짝이 없는 헛짓거리라 생각한다. 특히 중애천황과 신공황후는 200년대나 300년대가 아니라 50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인물이라 확신한다. 무내숙니(武內宿禰) 역시 50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인물로 본다.
이들이 정말로 500년대 중반의 인물이 맞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필자의 견해가 너무 엉터리라 생각되는 분이 계시다면, 그래서 저에게 통렬한 반박을 하고 싶으시다면, 『일본서기』 중애기 신공기 등에 나오는 월삭간지들을 정밀하게 한번 연구 조사해 보신 후에 해주시기 바란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면, 중애천황 즉위년의 월삭간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즉위 원년 봄 정월 경인삭 경자(11일)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가을 9월 병술삭(1일)에 모황후를 황태후(皇太后)로 높였다. 겨울 11월 을유삭(1일)에 군신에게 말하기를...., 윤11월 을묘삭 무오(4일)에 월국(越國;코시노쿠니)이 백조 네 마리를 바쳤다 |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도 그대로 계산하면 중애천황의 즉위는 서기 192년(임신년)이지만, 실제 192년의 월삭간지는 위에 기록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한보식 박사가 펴낸 『연력대전』을 보면 서기 192년의 실제 월삭간지는 정월이 경인삭으로 위의 중애기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나머지 월삭간지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서기 192년의 9월은 병술삭이 아니라 병진삭이고, 11월은 을유삭이 아니라 을묘삭이다. 윤11월은 없고, 12월은 을유삭이다.
당대부터 잘못된 역법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고 후대의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연도 계산을 잘못 추정하여 엉터리로 기술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서기 192년의 실제 월삭간지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위 기록의 연도를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면 2갑자 수정설에 따라 120년을 끌어내려 312년의 월삭간지와 대조해 보면 어떨까? 한보식 박사가 펴낸 『연력대전』에 따르면 서기 312년(임신년)의 정월은 계축삭이고, 9월은 기묘삭, 11월은 무인삭, 12월은 무신삭이다. 위 『일본서기』 중애기에 기록된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120년을 끌어내리면 들어맞는다는 소위 ‘2갑자 수정설’이란 게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지 더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기원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월이 경인삭이고, 9월이 병술삭, 11월이 을유삭, 윤11월이 을묘삭, 이 모두가 딱 맞아 떨어지는 해를 찾기는 쉽지가 않다.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서기 192년도 아니고 312년도 아니다. 이들 월삭간지가 딱 맞아 떨어지는 해는 바로 서기 533년이다. 서기 533년의 월삭간지가 1월 병인삭, 9월 병술삭, 11월 을유삭, 12월 을묘삭이다. 실제는 12월인데 『일본서기』 중애기에는 윤11월로 잘못 기술되어 있다. 그 하나만 다를 뿐이다.
물론 그 다음 해인 중애천황 2년의 월삭간지 역시 534년의 실제 월삭간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후 신공황후 섭정기의 월삭간지도 그러하다. 필자가 중애천황과 신공황후를 서기 500년대 중반의 실존인물로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어지는 응신기의 월삭간지는 좀 다른데, 응신천황은 신공황후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신천황이 신공황후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의 기술은 잘못된 것이며, 응신천황은 신공황후보다 100년전인 서기 400년대 초반에 실존했던 인물로 추정된다는 점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논한 바 있으니, 좀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졸저 『임나의 인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에게는 3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 중 둘째아들은 항복하지 않고 신라에 맞서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구형왕의 그 둘째아들이 바로 중애천황(仲哀天皇)이고, 그 왕비가 신공황후(神功皇后)인 것이다. 차자표기를 분석해 보면 “중애(仲哀)천황=가수리(加須利)군=가실(嘉實)왕”의 이름이 같고, 그 아버지인 일본무존의 이름 “소대존(小碓尊; 코우스)”은 “구형왕(仇衡王)”과 똑같은 이름이요, 구형왕의 동생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은 “수인천황(垂仁天皇)”과 똑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여기서 더 상술하지 않기로 하겠다. 앞에서 얘기한 『임나의 인명』이라는 ebook이나 「김유신의 계보」라는 YouTube 동영상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3년(272년)조에는 ‘기각숙니(紀角宿禰)’라는 이름이 나온다. ‘紀角宿禰(기각숙니)’를 일본에서는 “키노츠노노스쿠네”라고 읽고 있으나 이는 본래 뭐라고 하는 이름을 그렇게 표기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후대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기각숙니(紀角宿禰)는 무내숙니(武內宿禰)의 이름이 와전된 표기이다. 앞에서 武內宿禰(무내숙니)라 표기된 인물의 실제 이름은 [muno-soni]였을 거라고 추찰한 바 있는데, [ᄆᆞᆮᄂᆞ]를 “任那, 木羅, 木出, 木生” 등으로 표기하였을 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밖에 ‘목각(木角)’이라고도 표기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角을 일본어로 “츠노(つの)”라 하는 바, [몿노/모츠노]를 木角이라고 차자하여 적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대인들이 [모츠노]를 표기한 그 木角의 木을 잘못 훈독하여 “키(き)”라고 읽었고, 그래서 2차 3차 표기자들이 [키츠노]→紀角이라고 표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紀角(기각)은 왜곡에 왜곡이 거듭된 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이 추측이 맞다면 응신기에 나오는 기각숙니(紀角宿禰)는 무내숙니(武內宿禰)와 동일한 이름이고 이들은 동일한 인물이라는 얘기가 된다. 또 『일본서기』 웅략천황 9년(465년)조에는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라는 이름이 나온다. 기소궁(紀小弓) 역시 후대의 표기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또 왜곡된 표기라 생각된다.
앞에서 [muno]를 일본어에서라면 “물(物; 모노)”이나 “毛野, 木野”라 표기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일본의 표기자들은 “木小矢(목소시)”라고도 표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소시(小矢)가 일본어로 “고야, 오야”이기 때문이다. [mono]를 표기한 “毛野, 木野”의 夜를 잘 알지 못하는 후대인들이 한자음 그대로 [모야]라고 음독하였고, 2차 3차 표기자들이 그 [모야]를 “木小矢”라 표기하였는데, 사람들이 矢와 弓이 같은 줄로 착각해 “木小弓”이라고도 쓴 것이다.
그러니까 응신기 3년조에 나오는 기각숙니(紀角宿禰)와 웅략기 9년조에 나오는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는 얼른 보기에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별개의 인물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이름을 가진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무내숙니(武內宿禰), 기각숙니(紀角宿禰),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이들이 모두 동일한 이름을 차자만 달리하여 표기한 것이고 이들이 모두 동일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또 있다. 칠지도(七支刀)라는 칼. 칠지도의 명문에 나오는 왜왕의 이름 ‘지조(旨造)’이다. ‘旨造(지조)’를 일본어에서 읽으면 “무네소(むねそ)”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칠지도(七支刀)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에 소장되어 있는 칼로, 일본의 국보이며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대상이다. 그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칼에 새겨져 있는 문장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4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남부지역을 약 200년간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과도 연관이 있어 한일 양국 사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펼쳐지곤 한다. 칠지도에 새겨져 있는 명문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판독이 되어 있다.
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百鍊鐵七支刀 [出]辟百兵 宜 供供侯王□□□□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造 傳示後世 |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명문의 맨 앞부분이다.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은 “태화(太和) 4년”으로 보고 369년 무렵에다 꿰맞추려 노력하거나 백제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연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태화(泰和)가 아닌 태청(泰淸)으로 판독해야 올바르며, 이는 양무제(梁武帝)의 일곱번째 연호로 ‘태청 4년’은 서기 550년이라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의 ‘十一月 十六日’은 ‘五月 十六日’로 판독되기도 했었는데, 둘 다 병오일이 아니라는 점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태청 4년(서기 550년) ‘二月 二十六日’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지만 칠지도의 명문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하겠다. 필자의 주된 관심사는 차자표기와 인명 국명 지명인 바, 그런 관점에서만 논하기로 한다.
백제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의미 파악이 몹시 어려운 부분인데, 필자는 기생성음(奇生聖音)이 인명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奇生(기생)은 임나를 가리키는 [목라]를 적은 ‘木生’이 후대로 가면서 奇生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고, 聖音(성음)은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sur+sur]로 중첩된 이름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만약 [sur+sur]을 표기한 것이라면 흠명천황 13년(552년)조에 보이는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와 통하는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자 契는 한국어에서 “설”이라고도 읽힌다.
만약 ‘聖音’이 한국어 [슬기]와 일본어 [오토(おと)]를 합쳐서 적은 [슭+오토]라는 이름이라면 계체천황 7년(513년)조에 나오는 ‘주리즉이(州利卽伊)’, 그리고 계체천황 10년조에 나오는 ‘주리즉차(州利卽次)’와 통하는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술곧/수리곧] 정도로 추찰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왜왕지조(倭王旨造) 부분 역시 난해하기 그지없다. 종래의 학자들은 왜왕의 이름이 지(旨)이고 그를 위해 칼을 만들었다고 핵석하였고 백과사전에도 다 그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필자는 종래의 학자들이 잘못 해석하였다고 본다. 왜왕의 이름은 ‘지(旨)’가 아니라 ‘지조(旨造; 무네소)’이고 이는 바로 무내숙니(武內宿禰)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칠지도 명문의 후반부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해야 옳다고 본다.
선세 이래로 이러한 칼은 없었던 바, 백제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은 그런 까닭으로 왜왕 ‘지조(旨造; 무네소)’를 위해 이 칼을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
필자의 주장을 요약 정맇라면 다음과 같다. 칠지도는 양무제 태청 4년(서기 550년)에 만들어졌으며, 한반도백제가 아닌 큐슈 구마강(球磨江) 하류의 야츠시로시(八代市)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큐슈백제’의 통치자 오타라(意多郞=경행천황)가 무내숙니(武內宿禰)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서기 552년에 신공황후를 통해 전해준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