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형 칼럼] 처서(處暑)의 아침

하진형

사진=하진형


엊그제까지만 해도 온 세상이 끓어오르는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것도 자연섭리의 일부분이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늘과 냉수를 찾기에 바빴다. 벼와 과일 등 농작물들은 더위를 즐기며 가을을 즐겁게 준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한계는 아주 얕고 약했다. 어쩌면 여름 계절에 가장 약한 존재가 사람이 아닐까.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 처서(處暑)에 내리는 처서비인 것이다. 서툰 농부가 맞이하는 비 오는 처서의 아침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처서비가 내리면 가을 수확이 줄어든다는 소리를 들어온 터에 모기의 입이 삐뚤어지고 풀이 돌아눕는다는 생각은 뒤로 밀린다. 무엇이든지 곡간이 넉넉해야 나눔도 넉넉해지는 법인데 말이다.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침 일찍 윗마을 농장에 올라가려 집을 나서니 길가 밭의 가장자리에 모자에 수건을 걸친 어머니가 옥수수를 따고 계신다. 아마도 마지막 옥수수일 것이다. 거의 보름 전부터 까치들이 옥수수를 따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까치가 옥수수를 따 먹는 것을 보면 껍질을 벗겨내고 알만 따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사람과 똑같다. 이럴 땐 사람과 무엇을 두고 구별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 어제는 과수원에 농약 뿌리는 품앗이를 했는데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수확량 감소에 걱정은 떠날 줄을 모른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풀들도 힘이 없어 보인다, 옆에는 여름 아침 안개가 친구하자며 떼를 쓰고 있다. 비가 멎고 나면 벼는 마지막 땅심을 끌어올릴 것이고, 과일들은 색이 다른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마음이 바쁜 농부는 잠시 쉬며 시간과 친구가 된다. 곁에 있는 단술병이 가벼워진다.

 

내리던 비가 빨랫줄에 걸려 물방울이 되더니 다시 빨래집게 끝에 매달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처서비는 땅으로 스며들어 긴 겨울을 땅속에서 지낼 것이다. 비도 봄을 기다릴까? 아니면 몸을 자연에 맡겨서 풀이되고 나무가 되고 또 곡식을 키우는 꽃으로 열매로 태어날까,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또 신기하다.

 

농부는 엉덩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일어나 아침 안개에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가을을 그린다. 막바지까지 잘 돌보아야 한다. 한두 개는 더 올 태풍에도 견디게 해 줘야 하고, 천둥소리에 놀라는 것도 막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가을 햇볕도 끌어와서 쬐어주어야 비로소 가을 수확을 맛볼 수 있다.

처서의 아침에 초보 농부는 혼잣말을 뇌까린다. ‘아직은 새카맣지만 한 해 농사를 지어보니 조금은 알겠다. 농작물을 사랑하는 법을,’ 또 고맙지 않은 것이 없다. 이웃집 어르신은 물론이고, 들판에 오는 봄의 전령인 쑥이며, 농로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 새롭게 피어나는 소리 없는 새싹의 틔움, 그리고 몰려오는 태풍에 실려 온 비와 뙤약볕, 어느 것 하나도 고맙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곡식도 귀가 있다고 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도 듣고, 멀리서 불어오는 소나기 바람소리도 듣는다. 그러니 처서비가 내리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사람들이 처서비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살이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듯 곡식을 익게 하는 것도 세상 만물들의 염려와 관심, 그리고 각자들의 품앗이로 인하여 가을 수확이 된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다.

 

아무리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줄고 시집갈 큰 애기까지 울게 한다 해도 종국에는 따뜻한 내년의 봄을 몰고 올 것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잡초는 편안함을 즐길 것이고 산새소리는 더욱 멀리 울려 퍼질 것이다. 이 또한 고맙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냥 매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 일이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


작성 2022.08.26 11:02 수정 2022.08.2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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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