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Now or Never, 정철호

현관문




 

 

20대 초중반 무렵, 우리 집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던 A 종교단체 사람들이 있었다. 21조로 다니시는 이분들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집에서 냉대를 받았지만 끊임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나는 현관문을 살짝 열고 그들과 마주했다. 팸플릿이 건네지고 나는 문을 닫았다. 다음에 찾아왔을 때도 나는 문을 열었고 이번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문틈 사이로 30분 이상 설교가 전해졌고 설교가 끝나갈 무렵 나는 왼손으로 꽉 잡고 있던 문고리를 조금씩 안쪽으로 당겼다. 또 다른 팸플릿을 받는 것으로 나는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찾아오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고 나는 그들을 집 안으로 들여서 커피를 내줬다. 내가 그들을 집안으로 들인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를 찾아 와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주머니 두 분 중 한 분이 A 종교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머지 한 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적잖이 실망을 했다. 사람들의 온갖 냉대를 참아가며 매일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는 사람치고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찾아왔지만 나는 더 이상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발길이 끊길 때쯤 처음 들어보는 B종교 단체 사람들이 찾아왔다.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였다. A 사람들과는 달리 태블릿 PC에 담긴 동영상을 내게 보여주었다. 영상 시청이 끝나자 아주머니 두 분 중 한 분이 내게 화장실로 가자고 했다. 자신이 물로 세례를 해주겠다는 것인데 나는 왜 갑자기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소리만 크고 무성의한 아주머니들에게 나는 작별을 고했다. AB 종교 단체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과연 이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성경책 몇 구절을 읽어주는 대신 적어도 내게 왜 이 종교를 믿어야 하는지 설명만 해줬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마저 느꼈다.

 

어머니는 내가 군대를 가고 A 종교 단체 사람들이 꾸준히 집으로 찾아와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그들에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내게 그들은 이단이니까 문 열어 주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되는지 물었지만 어머니 AB 종교단체 아주머니들처럼 내게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제대 후 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A 단체 사람들이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이유로 그들을 집으로 들였다. 그 당시 나는 종교와 철학에 심취해 있었는데 궁금한 점이 많았다. 특히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아주머니 두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A 종교보다는 신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의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하지 못하던 두 분은 다음 주에 목사님과 함께 오겠다며 나갔다.

 

아주머니들은 다음 주에 정말로 목사님과 함께 찾아왔고 나는 커피를 내왔다. 목사님은 선교활동을 10년 정도 해왔지만 집 안으로 들어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 역시 선교활동을 하는 남자를 집에 들인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여성 두 분만 짝을 지어 다니시는데 아주 가끔씩 남자분이 계셨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초인종을 누르고 이야기를 하는 건 여자였다. 우리는 종교 전반과 신에 대한 이야기를 2-3시간 정도 나눴고 내가 동의하기 힘든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후로 A 단체 사람들은 자취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꼬리표는 내가 이들과 만나면서 큰 장애물로 작용 했는데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본능적으로 나쁜 것 이라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단보다 더 큰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동성애였다. 중학교 시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의 동성애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성애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았을 때라 꽤나 충격적인 기억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사귀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고등학교 때는 같은 반에 별명이 게이인 친구가 있었다. 나와 친한 친구였는데 말과 행동이 모두 여성스러웠다. 그 친구가 사귀던 남학생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우리 반 친구들은 게이라는 의미를 여성스러운 남자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는 사귀던 남학생과 키스하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키고는 학교를 한동안 나오지 못했다. 학교에 다시 나오게 된 그 친구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나를 옥상으로 올라가는 한적한 계단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병원으로 끌려가서 에이즈 검사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며 울면서 말했다. 어린 나에게 에이즈와 정신과라는 단어는 너무 버거웠다. 에이즈는 내게 죽음을 의미했고 정신과는 미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둘과 연관되는 그 친구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작은 두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와 계속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동성애자는 모두 에이즈 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이즈 검사는 이해가 되었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은 부분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노르웨이로 교환학생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성을 경험하기도 했다. 여성인 네덜란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번 주말에 자신의 여자친구가 놀러 온다고 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나는 여자친구를 여자사람친구로 자연스럽게 바꾸어서 이야기하자 네덜란드 친구는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양성애라는 단어를 접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사전 속 의미를 알게 된 후 나는 그녀가 변태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나는 대학교에서 동성애자 외국남성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소개했는데 나중에 동성애자라고 고백했다. 아마도 동성애자라고 하면 나와 친해지기 어려울 거 같아서 거짓말을 한 거 같았다. 이 친구 역시 내가 전혀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싶은데 한국정서상 안될 거 같다는 것이었다. 동성애자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서 동성애자가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후 나는 동성애자가 실제로 입양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한국은 동성애자들을 법적인 배우자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독신자 입양제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조사할 당시 기준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입양을 시도된 적이 없었고 설사 시도된다고 하더라도 해당 정부부처와 입양기관들은 거부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신자 입양은 성적 착취의 우려로 동성 간에만 허용되는데 동성애자가 동성인 아이를 입양했을 때 성적 착취가 우려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동성애자가 아닌 아동성애자임이 당연한데 이러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동성애자들에게는 올바로 적용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입양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많은 논의를 살펴보았지만 왜 사람들이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생각하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단과 동성애처럼 소수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맹목적인 거부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 거부감에는 어떠한 근거들이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저 아무런 근거 없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근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근거들 때문에 거부감을 형성했다기 보다는 그 근거들을 알지 못한 채 혹은 그 근거들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거부감부터 가지게 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이단과 동성애는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다가왔다. 설령 이 문제가 옳음과 그름에 관한 문제라고 해도 인간에게는 진리를 100% 알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소수자 집단들이 옳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내가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맹목적인 거부감이 존재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른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 나에게 사회에 대한 질서와 도덕을 가르쳤던 어른들은 스스로 그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물론 일부 몰지각한 어른들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부 어른들의 문제라고 부르기에는 어느새 너무 많은 어른들의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도달할 때쯤 나는 어른들과의 소통을 포기했다. 어른들은 자신만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생각을 전할 수 없었고 이야기는 길고 반복적이며 재미조차 없었다. 같이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단과 동성애자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를 했던 나는 어느새 어른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내가 싫어하는 어른들에게 끊임없는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나는 하나하나 근거를 따져가면서 선택 할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경쟁을 위해서 써야만 했다. 그래서 편하게 그 동안의 경험과 지식에 빗대어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분명 경험은 그때 그 순간과 상황에 부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언제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예전의 경험에 빗대어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반대의견에는 귀를 닫고 내 의견에는 언제나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듯 했지만 듣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혐오하는 어른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나이가 더 들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어른의 시기에서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던 나를 철없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어른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또 누구를 거부하고 있을까.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1.29 10:51 수정 2019.01.2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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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