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34세가 되던 해에 8살 아래의 도반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중간에 돌아온다. 두 스님이 유학길에 올라 길을 가던 중 밤이 되어 동굴에서 자던 중에 심한 갈증으로 어둠 속에서 샘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런데 날이 밝고 보니 그것은 해골물이었고, 이를 알게 되자 역해서 모두 토할 것 같았다. 여기서 원효는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그 후 일심(一心), 무애(無碍), 화쟁(和諍)사상 등을 설파하여 신라불교를 중흥시켰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로지 소박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꿈꾸며 자루 없는 괭이를 들고 있는 농부는 청소수행을 하며 자신도 모르는 작은 돈오(頓悟)를 체험한다. 그것은 거대하지도 않고 멀리 있지도 않다. 식구(食口)가 된 길냥이에게 밥을 챙겨주던 때 가을하늘은 저 스스로 높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어디선가 멀지 않은 곳에서 하늘 세계로 올라가는 새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소리는 힘차고 신비스러웠다. 저 소리는 어떤 색깔일까?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물으며 그 청아하고 신비스러운 소리를 이웃과 어떻게 나눌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그 소리는 며칠째 초가을 하늘로 그 신비스런 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 청아하고 힘찬 소리를 즐기면서 은근히 그 새소리를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한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 몸속의 욕심 찌꺼기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우둔한 내 머리를 때린 것은.
인근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아들 녀석이 아비의 거처에 왔다. 이미 그와는 유·무식, 대소과다(大小寡多)를 막론하고 ‘서로가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기로 약속한 사이’다. 그때도 그 신비한 새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예요?” “새소리지, 이름은 모르지만 신비스럽지 않냐?” “이게 새소리라고요?” “‘그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가을 하늘로 보내는 소리가 멋있지 않냐~”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왔다.
잠시 후 “아버지, 저기 배나무 밑에 무슨 불빛 같은 것 보이죠?”’ 아들의 손끝을 따라가 살핀다. “응, 그래 뭔가 보이는 것 같다.” “이게 새 쫓는 소리예요.” “허걱~?” 그랬다. 수확기 새를 쫓기 위하여 맹금류(猛禽類) 소리를 내는 기계장치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나의 청각 민감도가 이렇게 떨어졌나? 내가 이렇게 늙어 가는가? 첨단기술의 영향도 있겠지만 내가 무디고 어리석은 탓이 더 크다.
그때 “괜찮아요. 아버지 영혼이 맑아서 그렇게 들리는 거예요. 모든 것을 좋게 보려하시잖아요.” 아들은 늙어가는 아비가 충격받을까 봐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랬다. 나는 매사에 조금씩 부족하다. 사물을 단순하게 보고 그대로 생각한다. 그러니 계산에 느릴 수밖에 없다. 언젠가 아들이 ‘아버지는 돈에 관심이 적잖아요, 저는 돈 많은 부자가 될 거예요.’ 그때 내가 자식들에게 무능한 아버지로 보였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다행이 커가면서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이해해 주어서 고마웠다.
언젠가 친구가 ‘넌 누구를 얘기하면 항상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부터 시작하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뜻밖에 듣는 말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 그렇기도 했다. 사무실에서는 ‘남 얘기하려면 좋은 얘기만 하자’며 지내왔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나쁘게 말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알게 모르게 조상들의 은덕을 많이 받고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생업 직장을 퇴직하고 새롭게 터를 잡으면서 산사(山寺)나 작은 성당 어느 곳에 마음을 내려둘까 고민도 했었지만 결국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곧 진리가 있는 곳임을 깨닫고 마음이 온전히 편안해졌다. 비록 작은 깨알만한 깨달음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 마음에 평정이 오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바로 이곳이 나의 자리인 것이다. 내일을 모르고 소풍 마치는 날 또한 모르지만 말이다.
원효스님이 일심(一心)을 설파하였다는데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한 이순신장군의 수결(手決)이 같은 일심(一心)이다. 불교에서 일심은 심식(心識)을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데 초유의 국난(國難)에서 시대적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본질에 충실하며 백성을 살리는 것도 그것과 통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극도의 불리함 속에서 기적처럼 명량대첩을 이루고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고 말한 그의 겸애(兼愛)를 생각한다. 결국 마음먹기다. 저 사람이 부처다 생각하고 보면 내가 부처가 아닐지라도 그가 부처로 보인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