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할 때 희망을 갖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 보리스 빠스떼르나끄
뒤돌아보면, 김천에서 철도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가 가장 힘든 시기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 비참했다. 예비고사(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를 보는 날, 나는 학교로 갔다.
시내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때는 눈초리가 따가웠다. ‘대학에 가지 않는 아이로구나!’ 그 뒤 졸업을 하고 김천 기관차 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방 한 칸을 구해 자취를 했다.
기관조사(현재의 부기관사)의 소임은 밤낮의 구별이 없었다. 저녁에 출근해 합숙소에서 이른 잠을 잤다. 밤 두세 시에 일어나 화물열차를 탔다.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깜박 깜박 어느새 기차는 낯선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기관사의 눈치를 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앞을 주시했다.
그 때는 몸이 고단했지만, 가장 힘든 건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동대구, 대전, 영주 등에 도착하여 합숙소에 가서 아침을 먹고 잠을 잤다. 오후 늦게 일어나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름다웠을 텐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다음 해 5월에 정기 신체검사를 했을 때, 재검을 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엑스레이(X-ray) 사진을 다시 찍었다.
‘헉!’ 폐결핵이었다. 그 당시는 불치병은 아니었지만, 큰 병이었다. 나는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폐결핵이 초기라 국립마산결핵병원으로 통원치료를 하며 근무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시장에서 좌판하시는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우셨다. “네가 그런 병에 걸리다니.......” 그 깊은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지내던 어느 날, 내 머릿속에 갑자기 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대학에 가자!’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한 생각이었다. 도무지 이성적이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온종일 그 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잡지 ‘진학’의 부록을 사서 전국의 대학을 다 알아보았다.
‘아, 등록금이 싼 대학들이 있구나!’ 그때 내 눈에 확 들어온 대학 이름, 국립사범대학이었다. 시도마다 하나씩 있는 국립대에는 사범대가 있었다. 등록금이 싸고 졸업하면 공립중등교사로 발령이 났다.
‘헉! 지금까지 왜 몰랐지?’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하니, 대학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던 것이다. 예비고사기출문제집을 구하여 기출문제를 분석했다. 단기간에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들이 다 사지선다형이라 잘 찍으면 될 것 같았다. 본고사 준비도 했다. 국어, 영어는 단기간에 될 것 같지 않아, 수학 위주로 공부했다. ㅊ대 사대에 합격했다. 기적이었다. 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든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새옹지마, ‘인생의 길흉화복은 미리 헤아릴 수 없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시골 노인의 말 한 마리가 엮어내는 파란만장한 인생사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에 우연히 말 한 마리를 얻으니, 다들 좋아했다. 하지만 노인은 담담했다. ‘두고 봐야지.’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되었다. 다들 슬퍼했지만, 노인은 담담했다. 전쟁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죽을 때, 아들은 무사했다. 세상만사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새옹지마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아모르파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시각각 닥쳐오는 사건사고들을 예측할 수 없다. 니체는 말한다. “사랑스럽게 받아들여라!”
우리는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때, 절망하여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솟아날 구멍을 찾아야 한다. 언뜻 섬광처럼 햇살이 비칠 것이다. 그 햇살을 끝까지 따라가면, 광활하게 펼쳐지는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날파리가 불빛 주위를 맹렬히 춤춘다
하루만의 생은 절망하려 해도 절망할 시간이 없다
- 최영철, <하루> 부분
어떤 생명체도 절망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절망을 한다.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 점심때 무엇을 먹을까? 버스는 몇 번을 탈까? 등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에서만 생각해야 한다.
천지자연의 오묘한 이치는 생각을 멈춰야 보인다. 고요히 머물면, 섬광처럼 답이 온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