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윗동네 농장에 품앗이를 갔다가 우연히 본 뉴스에 먼 나라로 이민을 갔었던 사람이 어린 자녀를 죽이고 도망쳐 온 용의자로 체포되어 범죄인 인도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소리가 TV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7살, 10살 된 아이의 시신이 엄마가 사용하던 가방 속에 있었다는데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일이었다. 물론 용의자로 지목된 아이의 엄마는 남편이 병사(病死)한 뒤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소식도 뒤이어 나왔지만 같이 뉴스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엄마가 자녀를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입을 모았다.
산 아래 작은 집에 살면서 길냥이를 식구로 거두었더니 새끼를 네 마리 낳았다. 어미 고양이도 작은 몸집인데 새끼까지 먹이려니 힘든 모습이 역력하다. 요즘은 아침이 되면 문 앞에 와서 야옹거린다. 꼬리를 치켜세워 나의 다리에 비비며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이젠 완전한 가족이 되었다. 챙겨주면 일단 한두 개를 먹고는 더 이상 먹지 않고 먼 산을 본다. 나에게 멀어지라는 신호다. 내가 멀어지면 새끼들을 불러내어 먹인다. 그리곤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애초에 길냥이라서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을 텐데 어미로서 새끼를 챙기는 모습이 그야말로 성스럽다.
그리고 새끼들이 다 먹고 나면 그제서야 남은 것들을 챙겨 먹고 새끼들이 안전한 곳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늘진 곳에서 쉰다. 비로소 자기의 의무를 다한 뒤에야 휴식을 갖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내가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하면 ‘쎄에~’하는 맹수소리를 내면서 또 경계한다. 그처럼 어미의 일은 고되면서도 고귀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참으로 보기 어려운 것을 보았다. 산 아래 자연에서 사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커다란 능구렁이가 두꺼비를 잡아먹고 있었다. 덩치 큰 두꺼비가 더 큰 능구렁이에게 칭칭 감겨 먹히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자연현상이 섭리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먹고 먹히는 것을 본다. 두꺼비를 구해 주어야 하나,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나? 그러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꾸며낸 설화(說話) 같기도 하지만 알을 밴 두꺼비는 구렁이 앞에서 배를 내보이는 두꺼비 춤을 추고 그것을 개구리로 본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으면 뱀의 뱃속에서 두꺼비알이 부화하여 밖으로 태어나온다는 말이 있다. 즉 어미 두꺼비는 자신의 몸을 내주어 새끼들을 살리는 것이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두꺼비는 물속의 한천질 알집에 알을 낳고 그것을 뚫고 나오는 것에서 이런 설화가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지만 예로부터 두꺼비는 영물(靈物)로 대우받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새끼들은 보기만 해도 귀엽고 예쁘다. 그리고 새끼들의 생명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고귀하다.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목숨을 거둘 권리는 없다. 그 권리는 자연의 섭리라는 것 밖에 없다. 그 섭리도 ‘고유의 수명’이라는 때가 되어야만 거둔다. 흔히 말하는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흉기로 변해 인위적으로 거둘 때에는 그야말로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다.
아이의 목숨을 거두고픈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만 우울증이든 생활고든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의 목숨은 물론 아이들을 생명을 꺾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부모를 선택할 여지도 없고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진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는 그 어떤 작은 꽃이라도 피어나 열매를 맺을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것은 꽃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피어난 야생화, 민들레 홑씨를 잉태할 노랗고 하얀 꽃, 한여름 뜨거운 벽돌담을 넘어가는 담쟁이의 꽃, 그리고 겨울에 피는 매화. 사람으로 태어나든 두꺼비 새끼로 태어나든 모든 생명은 귀하고 꽃이다. 꽃 중에서 가치 없거나 미운 꽃을 본적이 있는가? 아이도 꽃이고 어른도 꽃이며, 너도나도 모두 꽃이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