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행가 열풍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았다. 21세기 인류를 기습해 온 코로나의 기세가 쿨룩거린 2년여 동안, 각 방송국의 폐쇄된 스튜디오 안에서 펄럭거린 경연 무대는 공중파와 지상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의 안방을 감흥의 도가니로 몰아 흔들었다. 절세의 가객들을 발굴해 낸 역사의 마디 마당이기도 했다. 타고 난 노래 끼를 발휘하는 8세 어린이로부터, 수십 년을 무명의 가객으로 단돈 10만 여원의 출연료를 받고, 혹은 무료로 축하·기념행사장을 누비던 중년의 가객까지 세대도 층층이었다. 이 무대에서 불린, 아직도 불리고 있는 노래들은 십중팔구는 리메이크로 불렸다. 경연에 참가한 참가자의 ‘내 노래’는 없고, 원곡 가수가 오래 전에 세상에 내어 놓은 ‘네 노래’가 대세다. 그렇게 트로트 열풍은 2022년 10월 단풍의 계절까지 대중들의 가슴팍을 물들이고 있다. 그렇다. 10월이 오면 우리는 <잊혀 진 계절> 노래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10월의 마지막 날,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래야 이 황홀한, 허망한, 대책도 없이 그리운~ 계절이, 외로움으로 간들거리는 밤 깊은 동짓달 고개를 넘는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 시월의 마지막 밤을 /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 우리는 헤어졌어요 /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 그대의 진실인가요 /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 잊혀 져야 하는 건가요 //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 나에게 꿈을 주지만 /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 나를 올려요 /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 그대의 진실인가요 /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 잊혀 져야 하는 건가요 //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 나에게 꿈을 주지만 /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 나를 울려요.
노랫말에 아련한 서러움의 서정(抒情)이 대롱거린다. 기억(記憶)의 방에 가두어 두었던 생각들이 꼼실거린다. 기억은 장미꽃 떨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가지에 붙어 있는 가시에 콕~ 찔린 듯한 지난날의 아물지 않은 아픈 생각이다. 뜻 모를 이야기만 웅얼거리다가 멀어져 간 그 사람 얼굴이 아롱거린다. 한 마디 변명도 못하던 그 표정은 진실이었나, 아님 거짓이었나. 그렇게 세월은 가고 다시 10월이 돌아 왔다. 아픈 기억이 아련한 추억(追憶)으로 새록거린다. 추억은 먼 옛날, 호젓한 길섶에서 생솔가지에 매달린 솔잎 한 자락을 마른 풀 더미 위에 놓고, 불을 지필 때 피어오르던 연기의 향기와 같다. 세월이 가면 이처럼 아픈 기억은 아련한 추억으로 무르익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잊혀 진 계절> 이 노래는 시인으로 살다가 대중가요 작사가로 삶의 갈피를 전향한 작사가 박건호(1949~2007)가 자신의 실연사(失戀事)를 얽은 실화를 모티브로 지은 노래란다. 1980년 9월 가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박건호가 어느 여인과 포장마차에 마주 앉아서 소주 1병을 마셔버렸다. 서른 살을 갓 넘긴 노래시인 박건호가 연인과 이별을 하던 자리였단다. 언제부턴가 그녀와의 자리가 부담스러워질 무렵, 그녀를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연인을 보내기 위하여 술을 더 마셔버린 것이다.
그날 컴컴한 어둠 속에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한 박건호를 버스에 태워주면서‘이 분 흑석동 종점에 내리게 해 주세요’라고 했단다. 헤어지는 연인의 간절한 당부였다. 그녀가 부탁을 한 사람은 안내양(버스차장)이었다. 하지만 박건호는 다음 정거장(停車場)에서 바로 내려버렸다. 그리고 다시 버스가 온 길을 향하여 뒤돌아 달렸다. 그리고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가는 중간지점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는 목 까지 차 오른 숨을 고르기도 전에‘정아씨, 사랑해요’라고 한 마디를 하고서, 다시 동대문 쪽 오던 길을 향하여 달렸다. 그 날이 9월 마지막 날이다. 그래서 원래 이 노래 <잊혀 진 계절>의 첫 소절 가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9월의 마지막 밤을’이었으나, 노래발표가 늦어져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수정 되었고, 무명가수 이용을 인기반열에 올려놓는 세기의 절창인 되었단다.
이 노래는 원래 조영남의 목소리로 세상에 내어놓으려고 했었단다. 원곡은 다장조의 높은 곡이었고, 조영남이 마지막에 믹스다운작업(녹음)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이용에게로 온 것이란다. 울림과 떨림의 열창으로 <잊혀 진 계절>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어놓던 날, 이용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는 1957년 수원에서 출생하여 서울 휘문고·서울예대·네덜란드 델포트대와 미국 템플대에서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1981년 ‘국풍81’에서 <바람이려오>를 불러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국풍81은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민족문화의 계승과 대학생들의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관제적인 성격의 문화축제였다. 이용은 전영록·이치현·강인원·김수철과 음악학원 동기이고, 손석희·송승환과 휘문고 동창이다.
1982년 이용은 조용필의 아성(牙城)을 넘어 MBC 10대가수상 가수왕을 차지한다. 이때 조용필의 존재감은 1:100으로 표현해도 될 만큼 독보적이었다. 당시 조용필은 <못 찾겠다 꾀꼬리>, <비련>, <자존심> 등을 히트시키면서 정상을 지켰고, 조용필의 팬들은 이용의 추격과 추월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렸었다. 이 노래는 1984년 <잊혀 진 계절>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용이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용의 아버지는 사관학교 출신으로 직업군인이었으나, 이용이 인기가수로 데뷔한 몇 해 뒤 유명을 달리했다. 이용의 아들 이욱은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대한민국 국방부 군악대대에서 현역으로 복무를 마쳤다. 2008년 캐나다 퀘벡 400주년 기념 국제군악축제(대한민국 대표단장, 육군 대령 유차영)에도 참가하여 국위를 선양한 주인공이다.
<잊혀 진 계절> 작사가 박건호는 원래 시인이다. 그는 1949년 원주에서 태어나 20세에 시인 미당 서정주(1915~2000)가 발문(跋文)을 써 준 시집 『영원의 디딤돌』을 발간하였으며, 1972년 이해인(본명, 이명숙) 수녀와 풍문여중 동창인 박인희(본명, 박춘호)의 <모닥불> 가사를 쓰면서 작사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07년 12월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3천여 곡의 대중가요 작품을 남겼다. <내 곁에 있어 주>, <아, 대한민국>, <빙글 빙글>, <슬픈 인연>, <모나리자> 등이 대표곡이고, 시집 『타다가 남을 것들』, 『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 『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 『기다림이야 천년이 간들 어떠랴』, 『그리운 것은 오래 전에 떠났다』 등을 냈고,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라는 에세이집을 남겼다.
노랫말을 짓는 일로 일생을 다한 박건호의 마지막 연인이 ‘이 분 흑석동 정거장에 내려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던 버스 안내양은 누구였을까. 우리나라에 버스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18년 차이던, 1928년 20인승 버스 10여 대를 들여와 서울 시내에 운행하고, 1931년부터 버스걸(차장)을 운용하였다. 1931년 경성부 버스에 65명, 경인버스에 17명, 경성유람버스에 일부 버스걸이 있었단다. 지원자는 모집정원의 3배를 초과하는 경쟁률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6~19세 미혼녀로 독본(讀本, 글 읽기)·산술·상식·신체검사·구술시험을 거쳤고, 월급은 30~40원이었다. 그 후 1970년대까지 여차장들은 거의 버스에 매달린 상태로 출발하고 내렸다. 표 가방을 허리춤에 차고 ‘오라잇, 스톱’을 외친다. 해방광복 후 잠시 남자들이 등장했었다. 그러다가 1961년, 여성 안내양 제도가 재도입된다. 그녀들은 차 옆구리를 탕탕~치면서 ‘오라이~’를 외쳤다. 그 당시 버스는 중간에 문이 하나만 있었다. 그 문으로만 사람들이 타고 내려야만 했기 때문에 기사가 돈을 받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꼭 안내양이 필요했다. 그 시절 버스요금은 일반 35원, 학생 25원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스톱, 오라이~’ 대신 ‘정차, 발차’라는 순 우리말을 쓰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월급제가 아닌 시간제로 급료를 받았다. 1970년대에도 일당으로 임금을 받았다. 일은 이틀이나 사흘을 하고 하루 쉬는 정도였다. 사람이 모자랄 때는 5일씩 연달아서 일하기도 했다. 보통 출근은 아침 다섯 시에 하고 밤 열한 시에 퇴근했다. 막차를 탈 때는 그것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해서 자정 넘게까지 일했다. 일당은 하루 800원 정도였다. 이들은 1980년대 비로소 겨울날 털 점프를 입을 수가 있었다. 국민들 현장의 삶을 눈여겨 관찰한 그 당시 나라 지도자의 조치였다. 오늘날 정치꾼들은 무엇을 위하여 까발거리고 있는가. 이 안내양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흑백 사진 속의 유물이 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대중가요 유행가 속에 근현대사가 녹아들어 있다.
박건호의 대중가요 작사 데뷔작의 모티브인 모닥불은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의식 때 지피던 불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되겠다.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가르침에 종교적·철학적 기반을 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이다. 한자로는 불을 숭배한다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관중지방의 종교라는 의미의 현교(祆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삼이교는 당나라 때 서방에서 유입된 다른 나라 혹은 지방의 세 종교를 말하는데, 조로아스터교·마니교·네스토리아교를 지칭한다.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은 타오르는 불꽃이 놓인 제단 앞에서 제례를 행할 때, 제물이나 막대기 등에 불 냄새를 배이게 하여 경배를 표 한데서 유래한 것이란다.
조로아스터는 자라투스트라(추정, BC 630~553)의 그리스식 발음이다. 자라투스트라를 세상에 제대로 알린 인물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책,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속의 화자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하여 설파했고, 1896년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시를 발표했다. 니체가 이 책 속에서 설파한 ‘운명애(運命愛)’를 모티브로 지은 노래가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이다.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의 노래다.‘산다는 게 다 거런거지/ 누구나 빈손으로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 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마음이 먼저 울긋불긋해지는 10월이다. 그대의 <잊혀 진 계절>에도 단풍이 들고 있는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돌아서 간 그 연인의 얼굴을, 그 날의 쓸쓸했던 표정을. 아~ 활활거리는 단풍이여, 불타오르는 가슴팍이여~.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유차영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