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2022 경기권 DMZ 통일걷기

제2부 임진강에 연가(戀歌)가 흐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2022 경기권 DMZ 통일걷기 사흘째 일정은 숙소인 연천군 백학면 학마을회관을 출발하면서 시작된다. 이틀간 강행군으로 발걸음이 무거워져 몸은 고단하지만 영혼은 오히려 맑아진다. 옅은 햇살에 출렁거리는 아침, 이제 많이 친해진 조원들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판을 걸어간다. 본래 우리는 나와 남이 없는 것이다. 한 뿌리에서 나온 이파리 같은 존재다. 무아(無我)란 이런 의미가 아닌가. 진정한 자비심이란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아닐까.

 

3박 4일 동안 동고동락한 40명의 식구(食口)들

 

끝없이 이어진 석장천을 따라간다. 꽃향기에는 주인이 없다. 둑방에 올라서니 꽃향기가 비등한다. 둑방 왼쪽에는 야생화 천국, 오른쪽에는 연천의 황금 들녘이 펼쳐진다. 임진강에 합류하는 수서 생태계의 보고 사미천을 따라가니 우로 감악산, 좌로 소요산이 우리 일행에게 수고했노라 하면서 손을 내민다. 우리 곁으로 다가와 반겨주는 자연 덕분에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산들바람에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소리, 사미천 물소리와 가물가물 들려오는 새소리들이 기분 좋게 귓전에 머물다 간다. 이런 길을 걸으며 마음이 열리지 않을 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꽃향기 진동하는 석장천 둑방길

 

산허리 한 굽이를 넘어서니 시야가 넓게 펼쳐지면서 너른 평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 작은 동산이 보인다. 풍경이 그려내는 정경이 그리도 안온하게 느껴지는데 바로 고구려의 호로고루성이다. 성의 동벽 장대에 서니 고량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고 황포돛배 한 척이 임진강 물살을 가른다. 넓디넓은 초원을 걸으면서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강바람과 해바라기 군락지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함, 그리고 구름을 헤집고 들어오는 햇살들의 짜릿함을 맛본다.

 

호로고루성 가는 길

 

호로고루성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의 천연절벽 위에 세운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江岸坪地城)으로, 동서남북 중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가장 높은 장대가 있었던 동벽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 국경 역할을 했던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유적이기도 하다. 

 

임진강 절벽 위에 현무암으로 쌓은 호로고루 성벽

 

호로고루성 가까이에 있는 과거 임진강 수운의 종점인 고량포로 이동한다. 서해안에서 조류를 거슬려 생선과 새우젓, 소금배가 올라오고 장단백태 등의 곡물과 땔감이 한강으로 내려갔던 임진강 최대 포구 고량포. 1930년대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분점까지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과거의 영화는 사라지고 예나 지금이나 분단의 상징으로 가슴의 생채기가 된 고량포의 적벽 앞을 흐르는 임진강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하기만 하다. 

 

임진강 수운의 종착지 고량포구

 

근처에 있는 고량포의 역사박물관과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을 둘러본 후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 두루미 최대월동지 근처에 있는 1.21 무장공비의 철책 침투현장을 둘러보고 승전OP로 이동한다. 최전방관측소인 이곳에 서니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다가올 듯 가까이 보이고, 뒤로는 임진강이 휘돌아 간다. 가장 가까운 남북한 GP 거리가 750m밖에 되지 않아 육안으로도 철책 너머 북한군 초소와 군사시설들을 관측할 수 있는데, 오늘은 북한 주민들이 논에 나와서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21 무장공비 철책 침투 현장

 

승전OP 뒤를 돌아보면 고려 이색과 권근이 찬탄한 고호8경의 하나인 임진강과 고량포의 전경이 펼쳐지는데, 역사박물관과 주차장이 있는 자리에는 마을이, 적벽에는 서해안의 생선과 새우젓, 소금을 싣고 온 황포돛배들이 장단백태와 땔감을 싣고 하구로 내려가는 분주한 포구의 옛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평화누리길을 따라 도착한 파주 장산전망대는 송악산, 북한의 기정리마을과 남한의 대성리마을의 대형국기, 두루미 잠자리인 초평도와 강 건너 고구려성인 덕진산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임진각에서 율곡습지공원으로 이어지는 임진강변 생태탐방로가 발아래로 펼쳐지는 최고의 뷰 포인트이다. 

 

장산전망대에서 바라본 겨울 철새의 낙원 초평도(풀들섬)

 

통일대교를 지나 민통선 마을인 통일촌으로 들어선다. 통일촌은 1973년 제대 장병과 실향민들로 구성된 이주민들이 만든 정착촌으로, 대성동 마을과 함께 외부인의 입주가 허용되지 않는 민통선 북방 마을이다. 통일촌 부녀회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 후 미군 2사단 기지였던 캠프 그리브스(현재는 'DMZ 평화정거장')로 이동하여 이화여대 장이권교수의 'DMZ 소리여행' 강의를 듣고 3일째 일정을 마무리한다.

 

40여 년 전의 군시절을 떠올리게 한 캠프 그리브스의 내무반 막사  

 

캠프 그리브스에서 기상해 굳게 닫힌 남북출입사무소를 지나서 새로 지은 도라전망대로 올라간다. 도라전망대는 군사분계선에서 1.5km 떨어진 해발 167m 도라산 정상에 있는데, 2018년 말 지상 3층 규모로 새로 지어서 운영 중이다. 아침 일찍 이라 이곳은 바람 소리, 하늘을 나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북측 GP와 남측 GP, 사천강 너머로 개성공단과 개성 시내, 송악산과 북한의 지정리 마을, 남한의 대성동 마을, 우측 끝으로 판문점까지 시선을 가리지 않은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한눈에 들어온다.

 

개성공단과 개성 시내 모습. 그 너머 산 위에 대형선전물이 보인다.

 

전망대 뒤로 임진강과 감악산, 고대산, 파주, 문산 시내와 북한산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잠시 분단이 만들어낸 슬픈 아름다움에 빠져 할 말을 잃은 채 그냥 사방을 둘러만 본다. 이곳은 모든 것이 정지된, 흐르는 시간마저 돌처럼 멈춰서 있는 것 같다. 웃지도 울지도 않고 돌처럼 굳어 있는 풍경에 나그네는 절절한 감상(感傷)에 젖는다. 

 

철책을 가운데 두고 남한(우)과 북한(좌)의 GP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통일촌에서 나와 통일대교를 건너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로 들어선다. 임진각 평화나루에서 율곡습지공원까지 이어지는 9.1km의 구간으로,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과거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하지만 2016년부터 출입 절차를 밟은 일반인들에게 제한적으로 탐방로 출입이 허용되고 있는데 독수리, 재두루미, 쇠기러기 등 겨울 철새 월동지로 잘 알려진 초평도 옆을 지나간다. 

 

임진각에서 율곡습지공원으로 이어지는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민통선 내부에 있는 재두루미 최대월동지인 오금리는 가을이 한창 익고 있다. 사천강 하구와 광활한 논습지를 관찰할 수 있는데, 들판 규모가 백만 평으로 끝없이 펼쳐진 오금리의 지평선은 가히 장관이다. 임진강 너머 북한초소를 망원경으로 보니 북한군 얼굴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황금 들판에서 이곳 부녀회에서 제공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생태계 보전에 관심이 많은 이곳 주민들은 ‘민통선 안 논습지 탐사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영농활동을 하고 있다. 

 

 

오금리 들판에서 풀과 꽃으로 물들인 예쁜 손수건도 만들어 본다.

 

오금리 들녘과 성동 습지를 지나 도착한 최종 목적지 오두산전망대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해발 118m의 오두산 정상에 있다. 한 무리의 철새가 창공을 가로질러 훨훨 나른다. 남과 북의 강이 만나는 남녘땅 파주에서 북녘땅 개풍군을 바라보며 대원들 모두 한 사람씩 소회를 밝히며 3박 4일 100km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공존이 우리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몸으로 체험한 귀중한 여정이었음을 깨닫고, 모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임진강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남북을 오가는 철새떼

 

삶은 흐르는 물과 같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은 채, 우리는 그 흐름 속에 몸을 내맡긴다.

고성이 있는 강가의 옛터에 풀만 무성한데 임진강에 연가(戀歌)가 흐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10.13 09:42 수정 2022.10.1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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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