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코스미안상 은상] 아름다운 것들Ⅰ

윤은비

 

 설레는 것이 아름답다-안 해본 일

 

언제부터인가 재방송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폭죽을 터뜨리듯 피어나던 봄꽃에 놀라는가 싶었는데 세상은 어느새 연두를 지나 초록도 짙었다. 새 달력을 거는 일도, 첫 장을 넘기는 일도 새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성큼 지난 시간에 놀라며 새 학기가 시작될 때 다시 한 번 마음을 정비하는 것도 잠시, 한 해도 금방 다 가고 말리라 예감한다.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고 누군가는 가까이 혹은 멀리로 떠나간다. 그때마다 처음인 듯 가슴이 서늘하지만, 어쩌면 이 역시 예견된 일이며 가끔은 마주치는 일이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감기도 된통 앓게 된다. 사정없이 콧물을 훌쩍이며 체면을 구기는 일도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찾아온다. 뻔히 아는 것에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 분하긴 해도 감기 역시 나를 곯려 먹는 일에 익숙한 듯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언감생심 모험이나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어제와 같은 고요 또한 오랫동안 꿈꾸는 안녕이며 평화일지도 모른다. 

 

운전을 두려워하는 나는 시간 맞춰 기차를 타는 것이 안녕한 일상이다. 주차 시간을 넉넉히 고려하여 늦지 않게 나선 그날 아침, 대합실에 들어설 때 내가 타야 할 기차는 9분 지연을 표시하고 있었다. 오전 수업이 있어 함께 나온 아이도 조금 빠듯하지만, 지장은 없는 걸로 시간 계산을 마칠 즈음, 순식간에 45분으로 지연 시간 전광판이 화들짝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한 번쯤 지각하는 심정도 느껴보라는 엄마의 농담을 한심하게 들어넘기던 아이는 버스터미널로 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한 번 정도의 결석인들 뭐 그리 큰일이냐고 말해주고 싶지만, 아침 시간 발표가 있다며 지난밤 늦게까지 준비하던 것을 나도 보았던 터다. 

 

내가 직접 운전하여 러시아워의 도심을 통과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더구나 한 번도 다녀 보지 않은, 교통상황 방송 때마다 빠지지 않는 분기점과 나들목과 대학가의 유명한 오거리를 지나야 하는 일은 더욱 두려웠다. 아이를 내려주어야 하니 그 길을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제 내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머리를 복잡하게 쓰는 일도 가만히 서서는 할 수가 없도록 바빠졌다. 설사 그것이 몸만 부산한 우왕좌왕이라 할지라도. 

 

운전에 관하여 딱할 만큼 소심했다. 십만 킬로를 넘게 주행하는 동안, 주유경보등에 노란불이 들어와도 익숙한 동네주유소가 아니면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고속도로 주유소를 들러야 하는 일도 복병이었다. 그러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택시를 탄다고 해 봐야 늦기는 마찬가지, 방법은 딱 하나 나의 용기를 필요로 할 뿐이었다.

 

아이는 눈치를 보면서도 동승자의 충분한 역할을 강조하며 엄마의 결단을 부추겼다. 고속도로에 올라서 주유하면서 한숨 한 번 돌리고, 아이를 내려주어야 할 나들목을 놓치지 않으며 휴우, 한숨 또 한 번! 교통 방송에서 자주 듣던 도시 입구의 다리를 지나 강을 끼고 도는 외곽도로에 차를 올리며, 몇 번의 지하도를 빠져나오며, 그때마다 한 번 또 한 번 긴 한숨으로 스스로를 안정시켰다.

 

내 의지나 계획과 전혀 상관없이 속수무책으로 헝클어질 경우 몸으로 대응하는 메뉴얼 하나를 추가한다. 주변은 산만하고 어지럽지만, 목표를 향한 집중은 날카로워야 했다. 그것은 치열하게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 안 해본 일은 피하고 싶거나, 미룰 수 있는 한 끝까지 미룰 만큼 성가시고 두렵다. 그러나 반짝이는 내 인생의 저 한때, 안 해본 일은 살아있음의 뜨거운 확인이며 내 세계를 바꾸는 중요한 기록이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도 두려움은 줄지 않지만, 안 해본 일은 줄어들 것이다. 

 

어제 또 오늘이 재방송으로 흘러가듯 그날이 그날 같아도 내일은 언제나 가지 않은 길이다. 어쩌면 내일은 더 이상 오늘이 되지 않고 영원히 내일로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허둥대지 않고 차분하게 나이 들어가는 일 또한 안 해본 일로 남겨져 있다.

 

 

 잘못 본 것이 아름답다-첫눈이 본 것

 

욕심이 과했나 보다. 오늘도 짧은 치마차림이다. 오후엔 기차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간이역을 지나서 바다로 가는 작은 기차에 홀딱 마음을 뺏긴 채 내 자리를 찾아갔을 때 기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옆자리 할머니는 ‘아가씨랑 함께 가게 돼서 다행이네’라며 내 자리에 두었던 가방을 치운다. ‘흥, 아니거든요’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앉자마자 무차별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강적이다. 

 

어디 사느냐, 어딜 가느냐, 무슨 일로 가느냐, 초콜릿 먹을래? 요즘 애들은 단 거 안 좋아하더라 등등. 할머니면서 할머니답지 않은 권위에 기가 죽은 것인지, 나 역시 전혀 나답지 못하게 고분고분 대꾸하고 있다. 친구 만나러 간다고 대답하는 순간 바로 정조준, 조명탄을 쏘아 올린다. 남자친구구나, 한창 예쁠 때 많이많이 즐겨라, 우린 그때가 좋은 줄도 모르고 다 지나갔단다. 나야말로 충분히 깨닫고 있는 백번 지당하신 말씀까지.

 

역에서 바쁘게 만날 사람을 위해서는 한 번쯤 복장 점검이 필요했다. 적의 공세가 살짝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틈을 노려 얼른 콤팩트 한 번 두드리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도대체 무얼 바르기에 그렇게 ‘뽀사시하게’ 예쁘냐며, 노인이 입에 담기엔 만만치 않은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며 기어코 한 번 보잔다. 영어로 된 브랜드 이름을 산뜻하게 읽어내는 발음에서 할머니로만 방심했던 적의 프로필을 훔쳐보며 전세를 가다듬는다. 

 

고급스러운 선글라스엔 돋보기 기능도 있는 듯, 저 작은 글씨를 읽어내는 걸 보면 교정시력이 과히 나쁜 것도 아니건만, 나를 ‘요즘 젊은 애’로 보는 건 무슨 모순된 전략이란 말인가. 차마 딸이 사준 거라고는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나를 내 딸 또래쯤으로 보고 있는 듯하니, 감사할 따름이지만 아무리 내 차림이 과했기로서니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창밖으로 길게 이어지는 연 밭을 지날 때 꽃이 참 예쁘지 않냐며 순순히 정체를 밝힌다. 그림을 그리는데 연꽃도 큰 것 작은 걸로 여덟 점을 그렸다고. 아름다운 것을 짚어내는 안목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부터 나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자기 고집대로만 바라보고 믿어버린 화가 선생의 눈에서 민망하게, 들키지 않고 벗어날 수 있을까. 

 

좀 조용히 있고 싶은 내 바람은 의외의 아군을 만난다. 이 지방에 사는 조카며느린가 보다.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흘려지는 통화내용으로 보건대, 영민하고 세련된 젊은이 덕분에 나는 걱정을 덜게 된다. 조곤조곤 통화하는 아군의 지원을 놓치지 않고 무사히 퇴각한다.

 

‘친구 만나러 가면 오늘 집에는 안 가겠네’ ‘아뇨, 별로 오래있지 않을 거예요’ 쯤에서 교전을 마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일어서며 보내는 눈인사에 아직도 통화 중인 할머니는 내 등을 토닥이며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그 손끝에서 나를 요즘 젊은 애로 취급하고 있음을 한 번 더 확인한다. 혹 죄책감이 남을 것도 같지만, ‘정신도 시력도 멀쩡해 보이는 화가 선생님, 대단히 죄송하오나 저는 제 딸이 아니랍니다.’를 꾹 삼킨다. 

 

나잇값 못하는 복장으로 나선 내가 백번 잘못이지. 내가 그를 노병의 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눈은, 꿈에라도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가장 예쁜 시절의 나를 봐준 것이다. 첫눈이 본 것으로 순식간에 판단하고 여과 없이 믿어버리고 터무니없이 오해하고 고집부리고, 나라고 그런 일이 없었을까. 하물며 첫눈에 반하고서 죄 없는 발등인들 찍지 않았으리. 

 

반가운 사람이 서있는 역사 저편이 눈부시다. 나야말로 시간을 훌쩍 거슬러서 노화가 선생의 첫눈에 비친 그 아이로 돌아가고 싶다.

 

[윤은비]  

yooneh0520@hanmail.net

 

작성 2022.10.14 10:48 수정 2022.10.1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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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