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가슴먹먹한 가을날의 위안, 공주 마곡사

여계봉 선임기자

산사 가는 계곡 길은 까칠한 시월의 가을 햇살로 아직 뜨겁다. 산길 중간에 산새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을 놓고 새들이 즐거이 식사하는 정경이 비친다. 이 길을 걸었던 조선 숙종 때 사람 송상기는 『유마곡사기(遊麻谷寺記)』에서 “절은 고갯마루 아래에 있고, 십여 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라고 산사 주변의 선경을 칭송했다. 

 

마곡사는 공주시 사곡면(寺谷面) 태화산 동쪽 자락에 있다. 사곡면은 택리지나 정감록에서 '난을 피해 숨어 살기 좋다'는 이른바 정감록의 '십승지(十承地)' 하나로 꼽은 땅이다. '사곡'은 절이 있는 골짜기를 뜻하니, 사곡면의 상징적 중심이 곧 마곡사다. 사하촌을 지나서 태화산 마곡천을 따라가면 매표소가 나오고 이어 일주문이 나타난다. 처마 아래에 '태화산마곡사(泰華山麻谷寺)'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여기가 마곡사의 첫 산문이다. 현판의 글을 쓴 '여초(如初)'는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호로, 그는 '추사 이후 여초'라는 찬사를 받는 근현대 한국 서단의 대가다. 산문을 여는 여초거사의 반듯한 글씨와 함께 산사 가는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화려한 다포양식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마곡사 일주문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인 640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통일 신라 말기인 9세기경에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중창했고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 지눌과 그의 제자인 수우(守愚)가 대대적으로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마곡사라는 이름은 신라의 보철화상이 마곡사에서 설법을 펼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골짜기(谷)에 삼밭의 삼대(麻)와 같이 빼곡했다고 하여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지정된 마곡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 있으니 바로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했다. 일주문 옆으로 난 명상의 길은 선생이 자주 다녔던 산길인데 솔 향기 가득한 숲길을 따라 선생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명상의 길 중간에 있는 백범의 흉상

 

백범은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투옥되었으나 탈옥에 성공한 뒤 삼남을 거쳐 도피 생활을 하다가 오랜 망설임 끝에 이곳 마곡사로 출가한다.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6개월간 공부에 매진하다가 금강산으로 만행을 나서 평양 근처 대보산 영천암에서 1년 넘게 머문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에 나타나 있듯이 '출가해서 세속을 다 잊고 살 것인가, 아니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데 몸 받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지정 기념비  

 

청솔 아래 평탄한 산길이라 가슴에 솔내음이 켜켜이 잰다. 산에서 내려와 만나는 계곡 주변으로 온갖 낙엽수가 무성히 자라고 솔 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친다. 예부터 마곡천 주변 연두로 새로워지는 봄의 신록이 아름다워 단풍이 아름다운 근처의 갑사와 더불어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불리어온 곳이다. 물길이 크게 돌자 계곡 너머로 마곡사 암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산기슭의 암자에는 부처의 미소가 번지는 것만 같다. 숲으로는 투명한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햇살 멱을 감는 나무들의 몸내가 상큼하다. 

 

 

마곡사로 들어서는 마곡천은 선계와 속계의 경계다. 

 

가을 햇살에 푸름이 출렁거리는 숲속, 거기에 안긴 암자가 마치 녹음의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같다. 마곡사의 정문은 해탈문이다.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두 번째 문은 천왕문이다. 악귀의 범접을 막고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천왕문을 지나면 앞을 가로막는 마곡천과 길을 이어주는 극락교를 마주하게 된다. 햇빛 좋은 이런 날은 청솔 그늘 길을 걷는 것만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가 일품이다. 물소리에서 솔내음이 나고 솔바람에 돌돌돌 맑은 물소리가 섞여 있다.

 

마곡사 정문 해탈문. 남원에 속한다.

 

여기서 마곡천은 태극 모양으로 굽이치며 마곡사를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뉜다. 남원은 해탈문과 천왕문 왼편에 긴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수행의 공간을 이루고, 북원은 극락교 너머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은 공간적으로 남원에 속해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북원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들 산문을 통과하면서 세속의 때와 번뇌를 모두 벗은 뒤 최종적인 정화의 절차로 물을 건너는 의식을 치른 후에야 대광보전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한 가람 배치다.

 

남원의 중심 법당 영산전. 편액은 조선 세조 임금의 글씨다.  

 

극락교 건너 마곡사 북원에 들어서면 5층 석탑과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일직선 상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공간의 중심축을 이루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주변 모두를 압도한다. 좌로는 응진전, 백범당, 조사당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범종각과 요사인 심검당, 2층 규모의 고방 등이 자리한다. 

 

일직선 공간으로 배치된 북원의 5층석탑,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맑고 고즈넉한 대광보전에 쏟아지는 햇살이 황홀하다. 기척 없이 불어온 미풍이 슬쩍 풍경을 건드려 쨍그랑하는 소리를 낸다. 가장 수려한 명당 자리에 위치한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내부에는 화엄 사상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 불전 가운데가 아니라 법당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아 계신다. 1782년 대광보전이 완전히 소실되는 화재 속에서도 이 불상은 무사했다고 한다. 못을 쓰지 않고 한 가닥씩 짜서 만든 꽃살문에 새겨진 공화는 비바람에 마모돼 어렴풋한 채색만 남긴 채 애틋한 결을 드러내는 목 조각 위로 햇살이 두근거리며 내린다. 수백 년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꽃살문의 저 매력적인 선들을 바라보니 아침처럼 마음 기슭이 밝아진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보전. 편액은 당시 최고의 화가 강세황이 쓴 글씨다.

 

대부분의 절집에서 정면을 차지하는 대웅보전이 마곡사에서는 대광보전 뒤쪽 높은 곳에 서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외부에서는 2층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통층이다. 민흘림의 듬직한 기둥은 안정감 있게 서 있고 단청과 포작은 무척 화려하다. 섬세하고 다양한 문양의 문살을 보는 맛도 그만이다. 전각의 내부에는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굵직한 싸리나무 기둥 네 개가 서 있다. 마곡사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을 많이 돌수록 극락길에 가까워진다는 이야기에 부처님 눈치를 살피며 서너 바퀴만 돈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다.

 

대웅보전을 내려오면 백범이 스님이 되어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여 선생의 사진과 글씨 등을 전시한 ‘백범당(白凡堂)’ 전각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한 김구 선생이 옛일을 회상하며 심은 성성하게 자란 향나무도 볼 수 있다. 마곡천에서 백범교를 지나면 백범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로 갈 수 있는데, 삭발 바위 위에서 마곡천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절경이다.

 

왼쪽부터 응진전, 백범당과 백범이 심은 향나무 

 

정오 햇살이 산사에 들이치니 맞은편 봉우리들은 산 그림자로 그윽하다. 절 골짜기는 푸른 연기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나 마치 저물녘의 연못 같다. 마곡천을 따라 산사에서 사하촌으로 내려가는데 며칠 전 비가 와 계곡 물소리가 요란하다. 노자가 말하길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고 했거늘 다툼없이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흘러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이 어찌 도(道)가 아니며 법(法)이 아닐 수 있을까.

 

골짜기 물의 소임은 맑은 물을 하류로 내려보내는 일이다. 그래야 하류의 물이 정화된다. 복을 골짜기 물처럼 저잣거리 중생들에게 내려보내는 듯 마곡사 스님들의 염불 소리는 오늘따라 더 크게 들린다. 

 

 

암자를 휘감으며 사하촌으로 흘러가는 마곡천

 

사하촌으로 내려와 고즈넉한 찻집에서 따끈한 국화차를 마시니 주체못할 가을의 서정으로 시흥(詩興)이 샘솟는다.

 

 

국화향 슬며시 

앞뜰에 내려앉아 

가을에 스며드니

 

이런저런 심사(心思)

부질없는 아쉬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다 상한 마음 

겹겹이 쌓이고

낙엽처럼 메말라 

서걱거리면

 

마곡사 대광보전 

창호에 새겨진

빛바랜 꽃문살을 

만나고 오시게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yeogb@naver.com

 

 

 

 

 

 

 

 

작성 2022.10.17 10:49 수정 2022.10.17 11:41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여계봉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