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맙게도 세상 이치라는 것이 무엇이든 땀이 있으면 수확이 있다. 서툰 농부가 가꾼 작은 논에도 예외 없이 찾아와 기쁨을 준다. 봄을 보내면서 물꼬를 잡고 모내기를 하자 연두색 어린 벼가 진청색으로 바뀌어 가며 어느 날 이삭을 달고 나오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禾) 겸손을 가르쳤다. 그때 큰 태풍이 올라왔다. 서툰 농부와 벼는 같이 밤을 꼬박 세웠다. 물꼬를 한껏 높여 하체를 튼튼히 하고는 세찬 바람에 버티었다.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다음날 뜨거운 태양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곤 가을을 맞이했다. 서툰 농부와 벼의 승리가 아니라 감당할 만큼 시련을 준 후 맞보게 해 주는 자연의 배려였다.
엊그제는 이웃 멘토 농부의 도움을 받아 추수를 했다. 넓진 않지만 누런 들판에 콤바인이 지나가면 회색의 맨바닥을 드러낸다. 무거운 분무기를 메고 비틀거린 발자국의 흔적엔 우렁이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알곡과 분리된 볏짚은 잘게 잘려서 다시 땅을 덮는다. 겨우내 찬서리를 맞으며 흙을 기름지게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땅 기운을 유지시켜가는 것이다.
알곡은 푸른 비닐멍석에 널어 말린다. 예전엔 볏짚으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이 석유제품인 비닐멍석이다. 가볍고 보관도 쉽지만 아무래도 곡식 말리기에는 ‘토종 멍석’에 비할 수는 없다. 따뜻한 가을볕이 널어놓은 알곡 위로 쏟아져 내린다. 잘 마르면 방앗간으로 가져가 찧어서 이웃들과 나눌 것이다.
마당에 널린 벼 알곡을 보며 뿌듯한 기분으로 윗마을 웅이형 농장 일손 품앗이를 간다.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감을 빨리 따내어야 한다. 구부러진 회색 나무줄기에서 잎이 자라고 노란 꽃이 피더니 다시 푸른 감이 열리고 빨갛게 익어갔다. 그야말로 기적이다. 도대체 땅속엔 어떤 조화(造化)가 있어서 이런 기적들을 일구어낼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까부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조화로움이 반복되며 경이로움을 준다. 생각할수록 벼의 고개숙임이 다가오고 나를 먹여 살리는 세상만물이 고맙다.
어두워지기 전에 멍석 정리를 해야지 하며 집에 오니 널린 벼에 새들의 발자국이 빼곡하다. 손바닥만 한 빈곳도 없다. 새들이 잔치를 한 모양이다. 어차피 찧어서는 나눔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많지도 않은 벼를 새들이 먼저 차지한 것 같아 너털웃음이 나온다. 몸집 작은 새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 싶기도 하지만 까치 떼까지 몰려와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라도 방책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데, 프로 농부라면 농협 건조기에서 말리기라도 하겠지만 조합원도 아니고 겨우 3백여 평에서 수확했으니 마당에서 말릴 수밖에 없다. 그것을 참새 떼는 보리수나무에 숨고, 까치 떼는 높은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적어도 사나흘은 햇볕에 말려야 한단다. 낮엔 널고 저녁엔 덮어두어야 하는데 새때를 지킬 이가 없으니 난감하다. 추수한 뒷날 아침에 창문을 여니 누런 벼가 베어지고 벼 밑둥이만 남겨진 논바닥에 하얀 서리가 내려있다. 추수는 기가 막히게 때를 맞추었지만 묵묵히 돌고 있는 자연의 시계 앞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다. 하긴 한로(寒露)는 이미 지나갔고 낼모레면 상강(霜降)이다. 올들어 처음 내린 서리를 보면서 한기(寒氣)를 느낀다. 나만 추울까? 새들도 나무도 다 추울 것이다.
오늘도 일손 돕기를 가야 하는데 라는 궁리(窮理)를 하다가 얼마 전에 가족이 된 고양이의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밥그릇과 물그릇을 벼를 말려놓은 멍석 가까이에 가져다 놓았다. 새들이 와서 알곡을 먹으면 가족의 일원인 고양이가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전 일을 돕고 벼를 뒤집어 말리려고 내려오니 나의 어리석은 기대는 우습게도 산산이 무너졌다. 고양이들은 사료만 먹고는 간데없고 참새와 까치 떼가 집단무(集團舞)를 추듯 멍석 위에서 난리를 떨고 있다. 그야말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다가가서 급브레이크를 밟자 또 다른 군무(群舞)를 추며 후다닥 날아오른다. 새 떼가 오르내리는 모습은 악보(樂譜)가 단체로 오르내려 ‘새들의 오케스트라’로 보인다.
그래 어차피 나눠 먹으려고 했던 거다. 너희들도 살면서 편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 고양이 네 식구 사료도 한 움큼이면 남는데 참새 뱃속에 얼마나 들어가겠니, 때도 수확기인데 너희들도 즐겁게 놀며 먹어라. 먹을 만큼 먹으면 물러날 것이고 내일이면 잘 말려진 벼도 거두어져 정미소로 갈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와 작은 창으로 밖을 살피니 까치는 새끼고양이를 희롱(戱弄)하고, 발레리나가 된 참새는 춤추기에 여념이 없다. 이웃집 강아지는 저만큼에서 짖고 있다.
가을하늘에 여유롭게 떠가는 구름이 웃으며 내려다본다. 비어있는 논은 내년 봄을 꿈꾸고 까치밥으로 남겨진 대봉감은 높은 가지 끝에서 더욱 붉어간다. 세상은 전체가 나눔이고 나눔은 곧 사랑이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