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나'를 위한 선물, 사나사 템플스테이

여계봉 선임기자

 

양평 용문사 자락에 있는 사나사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가을 산길을 삼십 명의 도반(道伴)들과 함께 걷는다. 사실 사나사는 기자가 용문산에 산행을 오면 하산할 때 자주 지나친 사찰이다. 그런데 오늘은 산 아래 사하촌에서 절이 있는 산 위로 올라가고 있다.

 

오늘 처음 만나 아직은 서먹서먹한 도반들과 말없이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니 고독이 산죽의 이파리처럼 살갗을 스치며 다가온다. 낙엽을 떨구고 있는 길가의 나무들을 보니 나도 무언가 미련 없이 떨구고 싶다.

 

사나사 가는 계곡

 

걸어온 지난날의 굽어진 길이 꿈결처럼 아련하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러나 내가 나에게 묻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다. 해답을 구할 수 있는 이 또한 오직 '나'뿐이다. 

 

절은 한 권의 시집이어야 한다. 절에는 시가 있어야 한다. 시(詩)란 말씀 언(言) 자와 절 사(寺)가 합쳐진 단어다. 수행자의 탈속한 말은 바로 시가 된다. 그래서 암자 가는 길은 시정(詩情) 넘치는 길이다.

 

 

용문산 사나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니 용문산 너른 품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사나사 암자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서슬 퍼런 한풍이 이곳에서 순해진다. 절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집이 산에 있음은 얼마나 적실한가. 

 

빛바랜 단청, 갈라진 흙벽, 넝쿨 뻗친 토담, 마모된 3층 석탑, 갈라진 태고 보우스님의 석종비. 저마다 견뎌온 세월의 겹이 두터우니 그 안에 담긴 사연은 또 얼마나 흥건하랴. 

 

고려 왕사 태고 보우스님 부도탑

 

경내로 들어서자 무념(無念) 스님이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스님은 사나사로 출가해서 수계를 받으셨는데 20여 년 동안 전국의 사찰에서 수행 생활을 하시다가 20여 일 전 자신이 출가한 사나사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사나사에서 열리는 첫 템플스테이 행사라 그런지 스님도 다소 긴장된 표정이다.

 

사나사(舍那寺)는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29)이 923년(고려 태조 6)에 그의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절은 창건 당시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절 이름을 사나사라고 한 것은 노사나불을 모신 것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화엄종 계통의 도량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

 

숙소를 배정받고 환복을 한 후 대적광전 앞으로 모이면서 본격적으로 1박 2일의 템플스테이가 시작된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신 대적광전에서 사찰 예절 공부부터 시작된다. 스님께서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를 배우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뀐다고 하신다.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로 내가 변하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이다. 만다라 그리기, 108배 올리기, 명상을 통해 내 마음의 쉼표를 찾은 이들은 작은 것에서부터 나를 위한 삶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암자의 솔 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친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절이다. 사나사 계곡을 포행(布行)하면서 물소리 명상을 하다 보니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된 삼십 명의 도반들은 스스로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비우고 또 비우니, 저마다의 인생에 덧칠해진 마음의 때를 벗는 중이다. 

 

공양간에서 먹는 저녁은 도시에선 여간해서 맛보기 힘든 민들레 겉절이며 눈개승마 무침, 삼잎국화 나물, 전호 나물 등 싱그러운 초록에 눈이 먼저 즐겁다. 여기에 새콤달콤한 매실 장아찌와 산초 기름에 구워낸 두부, 연잎 가루를 넣어 지은 밥과 곤드레 된장국까지 고기 한 점 없어도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공양간의 불이 꺼지고 산사에는 적막이 내린다. 잠시 후 범종루에서 종소리가 어둠을 타고 허공을 가르며 어둠 속을 메아리친다. 깊고 장엄한 종소리는 평온과 안식의 자비로운 울림이다. 몸이 떨릴 만큼 강렬한 울림이 동심원을 만들며 산사 바깥으로 퍼져나간다. 산사의 어둠은 칠흑같이 짙은 어둠이다. 빛의 번짐이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다. 짙디짙은 어둠은 맑은 어둠이다.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는 맑은 어둠이다. 나도 삼독(三毒)과 헛된 번뇌를 종소리에 실어 보낸다. 그리고 온전히 열려있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비우고 또 비운다.

 

종소리는 평온과 안식의 자비로운 울림이다. 

 

저녁 예불까지 마친 후 마음이 평안해진 탓인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안식의 어둠 속으로 건너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목탁 소리에 눈을 뜨니 밖은 아직 어둠 속이다. 문을 열고 마루에 걸터앉아 맑고 짙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니 멀리 어둠 속에서 목탁 소리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별빛이 인사한다. 별이 빛나는 건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스님 따라 계곡을 오른다. 용소폭포로 올라가는 길에 붉디붉은 단풍잎을 만난다. 곱고 화려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알리다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바스러질 듯 약한 몸을 구부리고 오그려 다른 생명을 보듬는 낙엽이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하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 너무나도 많은 것을 움켜쥐려 발버둥 치는 우리 중생과 낙엽의 삶은 어찌 이리도 다른가. 

 

암자는 언제나 절하듯 낮고 정결하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늘 허둥대는 상태, 즉 번뇌에 휘둘리는 삶, 누구에게 기대는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걸림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1박 2일의 사나사 템플스테이.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앞만 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비춰보게 해주는 맑은 물이자 삶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10.31 11:08 수정 2022.10.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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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