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1597년 7월 15일 거제도 북단의 칠천량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전라도 방면으로 퇴각했으나 조선수군은 거의 궤멸 상태였다. 마땅한 대안이 없자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출발하여 섬진강을 건너 구례, 곡성, 순천, 벌교, 낙안, 보성으로 가면서 패잔병들과 무기를 수습하였다. 보성 땅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군량미 600석 이상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가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이런 장계를 올린 후, 이순신 장군은 8월 17일 봇재를 넘어 군영구미(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 마을) 해변으로 가서 남은 배 12척을 인수하여 군량미를 싣고 회령진성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에 배설이 나타나지 않았다.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거의 한 나절 간격으로 추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마하수를 비롯한 보성의 의병들이 나서서 어선을 동원하여 곡식을 싣고 8월 18일 회령진으로 건너갔다.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경상도 합천 초계의 권율 장군 원수진에서 출발하여 육로 행군을 하던 이순신이 처음 배를 탄 곳이 이곳 군영구미다. 지명에 구미(龜尾)가 들어가는 곳은 굴곡진 만을 말한다. 주로 모래사장이나 갯벌이 있는 해변이 많다. 군영구미도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