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행가(流行歌)는 시대와 세월을 따라 흐르는 곡조, 우리 대중가요의 품에 안겨 있는 한 장르라고 하면 적절하리라. 이 유행가 노랫말은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사회정서와 그 속을 살아낸 대중들 삶과 역사 속의 사연과 마디를 품고 있다. 이런 면에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서울풍경과 시대 감성을 리얼리티로 얽은 대표곡을 꼽는다면 바로 현인의 절창 <서울야곡>이 될 터이다. 이 노래는 1950년 6월 럭키레코드에서 발매한 음반 A면에 실렸고, B면은 공미선의 <눈물의 세뇨리다>이다. 그 시절 SP 음반에는 양면에 1곡씩을 실었다. 이 <서울야곡>은 멜로디가 먼저 구상되었고, 이어서 노랫말이 오선지 위에 걸쳐졌다. 가수 현인이 자신의 본명 현동주로 곡을 지으며, 음정·음색·창법·가창 스타일 등을 자신에게 맞춘 노래다. 멜로디는 한국 대중가요사에 탱고 리듬을 선도한 곡이지만, 노랫말은 축축하다.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를 헤매는 방랑자, 바가본도의 아픈 엘레지~.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때엔 /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 /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 /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 레인코트 옷깃을 올리며 / 오늘 밤도 울어야 하나 / 바가본도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보신각 골목길을 서성거리는 방랑자의 실루엣이 노랫말에 어른거린다. 네거리에 버려져,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는 그 누가 버렸을까. 흩어진 꽃다발, 짓밟히는 꽃떨기는 바람을 맞은 나그네의 가슴팍이다. 이 절절한 사연을 머금은 <서울야곡>의 멜로딩 사연은 이렇다. 현인은 해방 광복을 맞이한 이듬해 1946년 2월 중국 상하이(1943년 일본→상해 이주)에서 부산으로 오는 귀국선을 타다가, 중국 군인에게 체포되어 4개월 동안 베이징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옥살이 이유는 일본 군대에 위문공연을 한 이력이란다. 일본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하여 괴뢰국가 만주국을 건국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여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중국과 적대적 전쟁을 했었다. 그 시절 일본 군대에 위문공연을 하였으니, 결과적으로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저들 눈총의 타킷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감옥 속에서 해방 광복을 맞이한 서울을 생각하며 만들었던 탱고 멜로디가 이 노래의 오선지 마디와 음표이며, 이에 작사가 유호가 해방광복을 맞이한 서울의 풍취를 얽은 노랫말을 얹었다.
탱고라는 말은, ‘멈추지 않는 춤·비밀 만남의 장소·특별한 공간’이라는 의미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비밀리에 추든 탱고 춤은, 1880년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 거주지역에서 생겨났다. 처음 명칭은, 바일리 꼰 꼬르떼(baile con corte)였다. 탱고가 탄생할 무렵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성들은 신발 목이 긴 부츠에 쇠 발톱(spur)을 달고 가우초(gaucho)라는 바지를 입었으며, 여성은 풍성한 스커트를 입었다. 그와 같은 복장으로 춤을 추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동작들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탱고의 기본동작이다. 이 탱고 리듬은 현인이 일본 유학 중에 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대중문화예술의 서세동진(西勢東進) 빗방울이 현인의 옷자락에 젖어서 우리나라로 들어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우리 대중가요는 엔카를 닮은 트로트와, 민요를 계승한 신민요 양식으로 불리었고, 재즈 송으로 불리던 서양식 노래는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광복 후 미군정 3년여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7음계나 스윙·탱고·블루스·부기우기·맘보·차차차 등의 작품들이 늘어난다. 이러한 풍취는 6.25전쟁 휴전 후, 미8군사령부가 일본 동경에서 서울로 이전해 오면서 미8군무대를 통하여 창창(唱彰)되는데, 이러한 경향을 선도한 노래가 <서울야곡>이다. 해방 광복 후 미 군정청은 우리나라 전 지역에 중대급 이상 부대 260여 개를 배치했었다. 병력은 10~17만여 명에 이른다. 2022년 우리나라 자치단체는 262개다. 따라서 그 시절 각 시군단위에 1개 부대가 주둔했다고 하면 맞을 듯하다. 이후 1960년대에 이어진 장르가 팝과 스탠더드 팝이고, 이때 우리 화(化)의 물결을 일으킨 노래가 오늘날 트로트, 그 시절에는 뽕짝으로 통했다.
방송극작가이던 유호는 <서울야곡> 노랫말에 서울풍경을 산문시처럼 펼쳤다. 충무로·명동·종로네거리·쇼윈도 빗물·버려진 꽃다발·버려졌으나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꽁초·코트 깃을 올리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을 스케치했다. 쇼윈도그라스·네온·마로니에·레인코트·바가본드(방랑자) 등 외래어로 서구적 촉감도 북돋우었다. 1절은 충무로, 2절은 보신각, 3절을 명동으로 묘사한 것도 다분한 의도로 보인다.
충무로(忠武路)는 서울시 중구 충무로1~5가다. 조선 말기까지는 한성부 남부관할 명례방·회현방·훈도방·낙선방·명철방 지역으로 비가 오면 질척거려서 다니기가 힘들어 진고개로도 불렸다. 이 근처를 대중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스카라계곡으로도 부른다. 1914년부터 이곳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본정(本町, 혼마치) 1정목(一丁目)~5정목까지 나뉘었다. 이곳은 해방광복 이후 1946년 10월 1일부로 일본식 동 이름을 우리 식으로 개정함에 따라, 이순신 장군의 시호인 충무를 따서 도로에 붙였다. 이순신 장군은 건천동(중구 인현동) 태생이고, 1545년 출생 당시 마른내골이라고 불리던 그 동네는 34가구가 살았다. 동학(東學, 경복궁 동쪽 학교)이 있던 이 마을에는 이순신·류성룡·원균이 동네 형과 아우로 지내면서 성장한 곳이다.
2절 보신각(普信閣)은 종로사거리에 있는 한옥 누각이다.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로 1396년(조선 태조) 창건했다가, 1869년(조선 고종)과 1979년에 재건했다. 보신각 이름은 정도전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구상할 때(1393년) 유교 5대 정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넣어서 지은 이름이다.(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 보신각). 보신각종은 본래 원각사에 있던 종으로 세조 때에 주조한 것인데, 1536년(중종 31년)에 숭례문 안으로 옮겨 놓았다가, 1597년(선조 30년)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1895년(고종 32년)에 종각에 보신각이란 편액이 걸린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절 명동(明洞)은 중구에 있는 명동1·2가, 충무로1·2가, 을지로1·2가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서울야곡> 노래 제목에 붙은 야곡(夜曲)은 밤의 풍취를 읊조리는 노래다. 이런 노래는 1933년 채규엽의 <홍등야곡>이 서단이고, 1939년 박단마가 <가야금 야곡>으로 뒤를 있다가, 1952년 신세영의 <전선야곡>, 1960년 황금심의 <오동동 야곡>, 1977년 길구의 <명동야곡>으로 이어진다. 이 <명동야곡>의 노랫말이 <서울야곡>과 엇대인다. ‘흔들리는 등잔 불빛 가까이/ 미소 짓는 그 사람은/ 오늘 밤은 더욱 예쁘오/ 아~ 깊어 가는 명동의 밤~.’ 이런 야곡은 소야곡(小夜曲)과는 다르다. 소야곡은 ‘어스름 저녁에 사랑하는 님이 살고 있는 창 아래서 부르는 노래’이며, <애수의 소야곡, 추억의 소야곡, 눈물의 소야곡>이 대표적이다. 이는 성악에서는 세레나데, 기악에서는 녹턴이라고 한다.
<서울야곡>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유호, 일명 호동아는 본명 유해준이다. ‘맑은 호수’라는 뜻의 유호는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군수와 부지사를 지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서 계동에 50칸이 넘는 집에서 살았으며, 양조장과 금광 경영으로 집안이 윤택했다. 그는 도쿄 데이고쿠 미술학교를 수료하고 동양극장 미술부와 문예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45년 KBS 편성과로 옮긴 후 라디오 작가로 데뷔했고, 국내 최초의 낭독소설 『기다리는 마음』을 집필했다. 1949년에는 경향신문 문화부기자로 입사했고, 6.25전쟁 중에는 육군본부 정훈국에서 근무했다. 196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라디오·TV 드라마를 집필하여, 1960년대 후반에 TBC-TV에서 일요드라마 극본을 맡았다가, 인기가 치솟자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작가이름을 붙인 『유호극장』으로 개칭, 5년간 250편을 방영한다. 그는 대중가요 작사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이별의 부산 정거장, 전우야 잘자라, 진짜 사나이> 등을 남기고 2019년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19년 구포(영도) 출생, 현인은 정부수립 후 직업으로 등록한 대한민국 가수 1호다.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고 세금을 내는 가수라는 의미다. 그는 2002년 향년 84세로 영원의 나라로 갔다.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일본제국주의 강제징용을 피하여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귀국하여 7인조 고향경음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했지만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부르면서 대중가수로 평생을 살았다. 이 <신라의 달밤>은 우리나라 가요계에 앵콜(앙코르, 재창, 再唱)문화를 유행시킨 노래다. 1947년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영화 『자유만세』를 상연하면서, 영화 1편에 더하여 초청 가수의 노래를 불러주는 ‘1+1행사’에서 현인이 부른 절창이다. 당시 관객들은 이 노래를 9회나 재창으로 신청했단다. 이 거사(巨事)는 <신라의 달밤>이 SP 음반으로 녹음된 1949년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서울야곡> 노래가 불린 지 72년이 지나간다. 봄 빗줄기를 머금고 눈물을 흘리던 쇼윈도그라스에 눈발이 곧 흩날리리라. 이 노래는 1970년 또록또록한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청의 주인공 전영이 리메이크하였으며, 2022년 5월 안성준이 KBS 가요무대에서 절창하여 온고지신의 감흥을 풍겼다. 그 시절 네온 등이 가물거리며 꺼져가던 명동은 이제는 밤이 새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 아~ 잊지 못할 명동의 연인이여, 그대 눈동자여~.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