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흘림골에서 주전골로 내려온 가을

여계봉 선임기자

 

가을은 생각보다 짧다. 붉은 단풍부터 샛노란 은행잎까지 그동안 시선을 현란하게 만들었던 이파리들이 바람에 흩날려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떨어지고 만다. 어떤 이는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쁘게 물든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워 넣고 가을의 끝을 느껴보려 한다. 기자도 이 가을을 떠나 보내기 전, 호젓한 가을 산길에서 우수에 젖어 낙엽을 밟아보려 남설악의 흘림골로 향한다.

 

남설악 흘림골에서 내려온 가을

 

생태계 보호를 위한 입산 금지로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남설악 흘림골은 2004년 개방되었으나, 2015년 큰 바위가 등산로를 덮쳐 등산객들이 사망하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여 다시 탐방로를 잠그는 바람에 산꾼들은 용소폭포 부근의 만경대에 올라 흘림골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어왔다. 그러다가 7년만인 올해 8월, 낙석 위험이 있는 등산로 주위의 바위를 제거하고 위험한 등산로에 철망을 설치하는 등 안전조치를 보강한 후 재개방하게 되었다.

 

남설악 최고의 단풍 명소로 알려진 강원도 양양의 흘림골 계곡은 용소폭포까지 이어지고, 용소폭포에서 오색약수까지는 주전골로 이어지는데 이 계곡들 주변의 숱한 기암괴석 봉우리들과 단풍이 어우러져 이들이 펼치는 풍경은 가히 설악산 최고의 가을 수채화로 알려져 있다.

 

흘림골과 주전골을 동시에 즐기는 방법은 흘림골에서 등선대와 용소폭포를 거쳐 주전골을 지나 오색약수까지 걷는 것이다. 흘림골 탐방지원센터에서 용소폭포 탐방지원센터까지는 3.1km로 약 3시간, 용소폭포에서 오색약수까지는 2.7km로 약 1시간 걸린다. 흘림골 탐방지원센터에서 등선대까지는 오르막, 등선대에서 용소폭포까지는 내리막, 용소폭포에서 오색약수까지는 평탄한 길이다. 따라서 산행은 주로 가장 해발이 높은 흘림골 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한다. 

 

흘림골로 들어가는 흘림골 탐방지원센터

 

독일 시인 괴테가 ‘모든 산봉우리마다 깊은 휴식이 있다.’라고 노래했는데, 이제 깊은 휴식에서 깨어난 가을의 흘림골로 들어간다. 흘림골이라는 이름은 늘 안개가 끼고 날씨가 흐린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인데, 탐방지원센터에서 등선대로 오르는 삼거리까지는 꾸준한 오르막이다. 탐방로 바로 옆으로 칠형제봉이 흘림골을 호위하듯 높게 서 있고 오르막은 등선대까지 쭉 이어진다. 이 길을 한 발 한 발 오르면 수백 년 수령의 아름드리 전나무와 단풍나무, 주목들이 뒤섞인 흘림골의 장관이 한 겹씩 벗겨진다.

 

여심폭포까지는 오르막이어도 그런대로 쉽게 오르지만, 여심폭포부터 등선대 입구까지는 깔딱고개라 부를 정도로 매우 가파르다. 여심폭포는 20m 높이 기암의 직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인데, 한때 폭포수를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던 명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등선대까지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힘들지만 흘림골 코스의 마지막 오르막이어서 여기를 오르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민망한 여심폭포 

 

등선대로 오르는 삼거리 능선에 도착해서 산행 열기를 식힌다. 마침 동해에서 설악산 서북 능선을 지나 한계령을 넘어온 해풍이 우리가 있는 남설악의 흘림골 능선을 스쳐 지나간다. 험한 산길을 걷다 힘들어 잠시 앉아서 쉴 때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온몸을 어루만지듯 스치고 지나가면 그 청량감은 시원한 맥주 한 잔보다 더 상쾌하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등선대는 탐방로에서 약 200m 벗어나 있다. 마지막 오르막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여 잠시 후 신선이 날아올랐다는 등선대(登仙臺)에 오른다. 등선대 전망대(1,002m)에 서니 사방으로 막힘없이 360도로 시야가 확 트인다. 남설악의 등선대는 안산, 대승령, 귀때기청봉,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인 설악산 서북 능선의 남쪽에 있다. 

 

등선대 바로 아래에 도열해서 산객을 반겨주는 칠형제

 

전망대 바로 앞에는 기암절벽의 칠형제봉이 도열하여 산객을 반겨주고, 북으로는 설악산 서북 능선의 장쾌한 마루금이 산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그 아래로 한계령 휴게소와 깊은 골짜기 사이에 실처럼 이어진 44번 국도가 내려다보인다. 등선대 주변으로는 기치창검(旗幟槍劍)한 암봉들이 날을 세우고, 암봉 사이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암괴송들이 장엄한 풍경에 무게를 더한다. 

 

끝청에서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설악산의 서북 능선

 

흘림골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등선대에서 바라보는 서북 능선이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점봉산에서 한계령을 지나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까지 설악산의 내밀한 속살을 360도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다. 흘림골 탐방은 내년 2월까지 하루 5,000명 예약제로 운영하니 사전 예약은 필수다.

 

등선대에 올라 잠시 선인(仙人)이 된 동무들

 

흘림골에서 용소폭포까지는 끝없는 내리막길이다. 깊고 험한 골짜기 흘림골 코스에 들어서자 새로 만든 나무 계단과 낙석을 대비한 철망 덮인 탐방로가 설치되어 있고, 낙석 발생 위험 지역에서는 경보안내 방송까지 나온다. 흘림골은 이처럼 위험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볼거리가 너무 많아 등선폭포까지 내려서는 급한 경사길이 끝날 때까지 내내 흥미진진하다. 

 

낙석에 대비하여 안전망으로 덮은 탐방로

 

가파른 등산로를 벗어나면 가느다란 물줄기가 길게 떨어지는 등선폭포, 세찬 물소리를 내며 굽이굽이 이어지는 십이폭포, 옥빛의 용소폭포, 그리고 고개를 돌면 여지없이 튀어나오는 기암괴석에 지루할 틈이 없다. 여기에 새빨간 단풍까지 어우러졌다면 더 기막혔을 텐데 가을의 끝이라 흘림골 단풍은 이미 옷을 벗었다. 탐방객들이 계곡과 주위의 기암들이 연출하는 비경을 감상하느라 자주 걸음을 멈추다 보니 내리막인데도 도무지 속도가 나질 않는다. 

 

탐방객의 혼을 빼앗는 흘림골의 비경 

 

용소삼거리부터 오색약수까지는 주전골 탐방로다. 주전골은 승려를 가장한 도둑 무리가 위조 엽전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용소폭포 입구에 있는 시루떡 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용소삼거리 가까이에 있는 용소폭포는 주전골 탐방로의 하이라이트다. 넓은 암반에 얇게 펴진 물줄기가 한군데로 모여 깊은 웅덩이로 떨어지는데, 하얀 계곡물이 붉은빛을 띠는 부드러운 암반 사이로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것이 압권이다.

 

맑은 옥색 물빛이 커다란 항아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용소폭포 

 

흘림골은 용소폭포에서 그 임무를 끝내고 이제는 주전골이 탐방객을 안내한다. 주전골은 흘림골과 달리 예약하지 않아도 된다. 평지나 다름없는 계곡이어서 부담 없이 걷기 좋다. 완만한 경사의 맑은 계곡 길 좌우로 우뚝 선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주위에는 마지막 단풍이 몸을 불사르고 있다. 넓은 소를 홍엽으로 가득 채운 선녀탕을 지나면 고고하게 우뚝 솟은 독주암이 등장하는 등 주전골의 비경이 끊임없이 이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전골 계곡의 최고 포토존 

 

주전골 길이 거의 끝나갈 즈음, 성국사에 도착한다. 성국사는 오색약수라는 이름을 짓게 한 고찰이어서 오색석사라고도 불린다. 성국사 경내에는 신라 시대의 삼층석탑과 돌사자, 돌계단이 돼버린 옛 석물 등 옛 사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성국사 근처 약수교 너머에 있는 오색약수는 1,500년경 성국사의 승려가 발견한 약수인데, 철분이 함유돼 쌉싸래한 맛이 독특하다.

 

오색약수의 사연이 담긴 성국사

 

남설악 흘림골에서 시작된 가을은 그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이제 주전골로 내려와 주전골 주위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주전골도 붉고 노란 마음을 한 장씩 내려놓고 있다. 시선을 어지럽히던 산색도, 물소리 소란했던 계곡도 어느새 모두 산 그림자에 잠겨 가고 있다. 이제 가을은 그 끝을 향해 달려간다.

 

가을의 끝에서 마지막을 불사르는 주전골 단풍

 

마음에 담겨있던 헛된 나뭇잎들도 낙엽 쌓인 가을 산길에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흘림골에서 주전골로 내려온 가을은 짧아서 그리고 속을 비워서 더 예쁘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yeogb@naver.com

 

 

작성 2022.11.14 11:20 수정 2022.11.14 12:36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여계봉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