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바라보는 세상] 가을비와 남자

신연강

 

여름비는 길 위에 흐르고 가을비는 몸에 감긴다. 한여름 이른 가을비가 내리면 몸은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생각만 앞서간다. 한여름의 꿈은 오간 데 없이 때 이른 가을 상념이 베개 밑을 떠돌고…. 그래서 가을비는 잔잔하지만, 잠을 조각조각 파편 내는 무거운 비로 내린다.

 

여름비는 잠을 몰아오고 가을비는 잠을 깨운다. 한밤 고단한 몸을 뉘었을 때, 귓전을 요란케 하는 여름비는 아득한 꿈의 나라를 향하지만, 귀에 조곤조곤 속삭이는 가을비는 꿈을 헤집으며 영혼을 깨운다. 그것이 바로 가을비가 가볍지만 무거운 이유다.

 

깊어가는 가을, 남자의 고독은 한없이 깊고 크다. 바바리를 걸치고 낙엽 진 길을 걷는 남자의 모습엔 고독과 쓸쓸함이 배어있고, 그 모습은 ‘말보로맨’의 뒷모습을 연상시키며 이내 푸른 담배 연기처럼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기에 가을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어울릴 것만 같은 계절이다. 여인이 봄을 손에서 놓을 수 없듯, 가을은 남자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쓸쓸함과 허기가 깃든 계절.

 

비로 인한 생각에 가슴이 젖어 든다. 봄비, 무감각한 생명을 깨우는 봄비는 무 생명의 시간을 생명의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봄비를 맞으며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나 불현듯 집 밖으로 나선다. 솟구치는 기운으로 초목이 눈부실 때, 여성들은 도심 거리에서 반짝이는 눈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시를 살려낸다. 아마도 한해 중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계절일 것이다. 그런 봄을 노래하는 봄비를 질투한다면 여름비는 강렬할 수밖에 없다. 

 

여름비는 문을 다급히 노크하는 사람같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온다. 무거운 구름을 이고도 지친 기색 없이 이곳저곳을 누비며, 과거의 기억을 실어 오기도 하고 현재의 시름을 사정없이 풀어놓기도 한다. 성이 나면 가끔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물바가지로 심술궂은 극한의 일을 한다. 반면 가을비는 차분히 스미는 피아노 운율처럼 마음에 흘러든다.

 

달리는 바퀴에서 여름비가 튕겨 나갔다. 너나없이 어디론가 질주하는 본능처럼 여름비가 차창을 두드리고 뇌리를 두드린다. 흘리고 흐르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한바탕 퍼붓는 세찬 비에 마음에 쌓여있던 묵은 때가 씻겨나갈 때의 쾌감. 여름비가 산뜻한 이유는 그같이 뒤끝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가을비는 한결같이 바퀴에 감아 들며 몸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낙엽이 질 때쯤 돌아오는 계절의 노래는 가슴을 맴돈다. 낙엽이 지는 것은 매번 다를 텐데 해마다 가을이면 그들의 노래가 돌아온다. 가을 남자, 최헌과 최백호. 약속이나 한 듯 음반점 한 곳은 ‘가을비 우산 속’을, 다른 곳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연신 내보낸다. 때론 약속이나 한 듯, 두 가수의 곡을 맞바꾸어 틀어낸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남자는 코트 깃을 올리고 말없이 어디론가 향한다.

 

해지는 저녁, 공원을 지나는 여자의 옷깃에 낙엽이 툭, 떨어질 때 여자의 시선은 발갛고 노란 낙엽으로 향한다. 그때면 회색빛 남자의 얼굴엔 고독이 더욱 짙어가고 바람에 부푼 남자의 몸은 허공에 한없이 부푼다. 가슴 에인 노래로 가슴에 구멍을 내놓고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노래를 듣고 거리를 걸어야 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최백호의 노래엔 고독이 뼛속까지 스민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다

 

-중 략-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갯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하얀 겨울에 떠나요

 

  1. 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가족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끝없이 길게 늘어선 도로 위에서 오늘도 묵묵히 운전대를 잡은 남자. 전철 안에서 점점 기우는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남자. 고독을 삼키며, 때론 눈물과 애잔함을 삼키며,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남자. 가을 속에서 가을비를 맞는 남자가 아름답다. 붉은 낙엽을 싣고 온 바람이 코트 깃 위에 잠시 머물다 시나브로 떠나갈 때, 가을 속 남자는 완성된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신연강 imilton@naver.com

 

작성 2022.11.14 12:07 수정 2022.11.1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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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