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과거를 보려면 시안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베이징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상하이에 가라.”는 말이 있다.
중국 시안은 13개의 왕조가 1,100년간 수도로 선택했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다. 중국의 중심에 위치해있다 보니 중국 전 대륙을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시진핑 주석의 고향이기도 한 시안은 중국 서부 내륙의 중심도시이며, 이탈리아의 로마, 이집트의 카이로, 그리스의 아테네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불리는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다. 이곳은 자연스럽게 서양과 이슬람, 중국 전역의 모든 문화가 함께 이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해만 보이고, 장안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넓다는 뜻이다.
현재 산시성(陝西省) 성도인 시안을 장안(長安)이라고 하는데,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는 도읍을 장안에 두었지만 모두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이들 왕조의 수도가 같은 장소가 아닌 이유는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새로운 정복 왕조가 이전 왕조의 도읍으로 쳐들어와서 도성을 완전히 불태우고 부숴버려 거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앞선 왕조의 도성보다 더 크고 더 호화로운 수도를 반복해서 건설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비슷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장안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도시 시안을 만든 사람은 3백 년간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재통일한 수 문제 양견이었다. 그는 수나라를 세운 그 이듬해에 한나라 장안성이 있던 동남쪽에 새로운 수도 대흥성(大興城)을 따로 세운 것이다.
시안은 당나라 때 들어와서 '가장 크고 안전한 도시'라는 뜻의 장안(長安)으로 이름이 바뀐다.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장안성은 동서로 9.7km, 남북으로 8.5km에 이르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보다 7배나 컸다고 한다.
현재의 성벽과 망루는 명나라 때 주원장에 의해 서북지역을 방위하기 위해 지어졌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주위로 폭이 10m에 이르는 해자를 깊이 팠다. 그리고는 서북 지역을 평안하게 하는 곳이라 하여 ‘시안(西安)’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안 성벽에 올라 그 옛날 장안성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어본다. 당나라 때 시인 두보와 백거이도 이곳 성벽에 올라 장안성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끝없이 펼쳐진 ‘관중평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사실 시안이 속한 이곳 관중평원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지세를 갖춘 곳이었다.
이곳에 오른 두보(杜甫)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라고 시름에 젖어 한탄을 하고, 유유자적이며 비교적 평온한 인생을 살았던 백거이(白居易)는 “수많은 집들은 마치 바둑판같고 열두 갈래 길은 채소밭처럼 가지런하네”라고 찬탄한다.
중국 최고의 번영기였던 당나라 때,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다양한 문명의 집결지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수많은 민족이 교류했고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으며 무역은 교차되었다. 1백만 명이 살았던 장안성에서 거주인의 1/3은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것이 당시 진정한 국제도시 장안의 모습이다.
그러나 장안은 황권 구현과 치안 유지를 위해 폐쇄적으로 구획되고 운영된 도시였다. 백성들의 거주구역을 ‘방’이라 불리는 108개 구역으로 나눠 놓고 각 구역별로 담장을 또 쌓았다. 외곽 성벽이 5m 높이였다면, 바둑판처럼 구획된 각 방은 2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난 4개의 커다란 성문은 각각 드나들 수 있는 신분이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다.
결코 백성을 위한 도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안에서의 백미는 역시 병마용(兵馬俑)일 것이다. 병사와 말의 형상으로 빚은 인형으로, 본디 허수아비라는 뜻의 ‘俑’은 장례에 부장품으로 쓰기 위해 나무나 진흙, 돌, 도기 등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말한다.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사후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도록 진흙으로 만들어진 병사와 말들은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굴되었고, 아직도 발굴이 진행 중에 있다.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기도 한다.
8천 명의 실물 크기 병사들로 이루어진 병마용은 황제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진짜 창과 칼을 들고 있었다. 발굴될 당시에는 원래 채색된 모습이었으나 초기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면서 불과 몇 시간 만에 색이 바래졌다고 한다.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기원전 260~210)은 중국을 단일한 정치 통합체로 통일했다. 사실 진시황제만큼 역사적으로 극과 극의 평가를 살아온 인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진시황은 유가에서 강조하는 '덕'을 갖추지 못한 군주였고, 책을 불태우고 비판자들을 생매장하는 무자비한 통치자로 기억되어왔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는 혁명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위대한 중화 문명'을 내세우기 위하여 진시황이 활용되고 있다. 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화칭츠(华清池)는 서안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여산(驪山)에 있는 온천지다. 유적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곳의 온천을 이용한 것은 약 6,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러다가 약 3,000년 전, 서주(西周)의 유왕(幽王)이 이곳에 여궁(驪宮)을 지었으며, 진시황과 한 무제도 행궁(行宮)을 지으면서 역대 왕실의 보양지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당나라 때는 왕실 원림이기도 했다.
특히 화칭츠는 당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과 양귀비(杨贵妃)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이름도 현종이 이곳에 궁을 만들어 화청궁(华淸宮)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한다. 현종은 이곳에서 양귀비와 함께 겨울을 지냈다고 한다.
백거이의 ‘장한가’에도 화칭츠가 등장한다.
春寒賜浴華淸池 봄추위 안 가셔도 화칭츠에서 목욕하길 천자께서 허락하니
溫泉水滑洗凝脂 기름처럼 매끄러운 그녀의 살, 온천물에 씻겨지네
侍兒扶起嬌無力 시녀에게 부축받은 그녀는 아리따움이 지나쳐 바로 설 힘마저 없으니
始是新承恩澤時 이때가 바로 천자의 새로운 은총이 내려지는 때이네
백거이의 시에는 이 구절 외에도 화칭츠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만큼 두 사람은 이곳을 사랑하였다. 둘의 연애시절에는 이곳이 매우 번성하고 당시 정치의 중심지가 되지만, 양귀비가 목숨을 잃게 되는 안사의 난 이후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도망가던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킨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서는 안록산의 군대가 쫓아오고 가마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현종은 결국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양귀비 일족들은 병사들에게 주살당하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도 환관 고력사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다. 양귀비는 배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어 죽는다. 자결했다고도 하고 고력사가 죽였다고도 한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38세.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던 여인,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난다.
대부분 한국 관광객들은 화칭츠에 오면 현종과 양귀비가 뜨거운 사랑을 나눈 장소로만 알고 있지 이곳이 중국 근대사의 엄청나게 중요한 역사적 현장인 줄은 모르고 그냥 지나친다.
1936년 국민당의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위해 시안에 주군 중인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의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시안에 들려 이곳 화청지의 오간청(五間聽)에 묵게 된다. 평소 항일투쟁에 미온적인 장제스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장쉐량 군대에 의해 야밤중에 습격을 받게 된 장제스는 맨발로 오간청 뒤 여산에 올라 바위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된다. 이 사건으로 인질이 된 국민당의 장제스는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통해 공동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합의하게 되고, 공산당은 기사회생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날의 역사를 ‘시안사변’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곳에서 일어난 시안사변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 공산당은 없었을 것이고, 세계정세와 질서 역시 지금과는 전혀 다른 판도가 되었을 것이다.
시안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한양릉(汉阳陵)도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신하, 병사, 마차, 동물 등 도용을 만들어서 릉 주변에 갱도를 파서 묻었다. 영원불멸을 추구함은 진나라 시황제나 한나라 황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결국 그들도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제의 무덤은 지하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하 공간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내부가 너무 어두워 관람하기 불편하고 사진을 찍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병마용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크기가 아기자기하며 인물 표정이 생생하고 다양하다. 발견된 도용들은 대부분 팔이 없는 나체의 모습인데, 당시에 나무로 만들어 조립한 팔은 떨어져 나갔고, 입힌 옷은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곳의 도용들은 더 이상 실물이 아니고 크기가 약간 줄은 인형 같은 모습이다. 진시황의 병마용갱과는 도용이 갖는 상징성이 약간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병마용을 보고 온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한나라 경제가 진시황제보다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이 높은 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발굴된 한나라의 유물들은 대체로 가축과 가옥의 자기가 많다. 이는 한나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교적 질서 하에 농경사회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은 법가(法家)의 나라이고 한나라는 유가(儒家)의 나라다. 법가에서 유가로 전환되면서 상업 활동이 줄고, 농경활동이 활발해진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말 못하는 도용들만이 아직도 지하에서 그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가운데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굴러가고 있다.
기자는 주말 저녁을 맞아 종루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나온 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시안의 중심가에 서있다. 그리고 잠시 상념에 잠긴다.
역대 왕조들의 찬란한 문화유적을 지닌 시안은 황제들 자신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을까.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