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 칼럼] 한국 여행에서 얻어듣고 내가 느낀 것들

정홍택

시월 중순에서 십일월 초순까지 3 주간 한국에 가서 친척, 친구들을 만나고 남해 일대 몇 군데를 관광하고 돌아왔습니다. 역시 한국은 뭉클뭉클 근육이 만져지는 역동의 국가라는 것을 실감하고 돌아왔습니다.

 

귀국길에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몇 시간 공항에서 기다리는 동안 느껴지는 분위기는 막 떠나온 한국과 너무 달랐습니다. 하네다 공항 내 면세 상점이 양편에 늘어선 긴 복도를 걷는 사람들도, 상점들도, 식당엘 들려도 사람들은 조용(적막?)하기만 했습니다. 어딜가나 왁자지껄한 한국 분위기에 익숙해진 나는 으스스 긴장감마저 들었습니다. 

 

미국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오며 나름대로 이 두 나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한국을 바다의 표면에 비교한다면 일본은 저 깊게 내려간 곳, 심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여러 번 지진에 쓰나미에 원전이 깨져 수 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어도 거리에 데모나 난동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부의 늑장 대응과 숫한 거짓말 속에서도 일본사람들은 스크럼짜고 주먹을 흔들며 정부를 비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리의 세월호 야단법석이 비교가 되어 자괴감에 쓴웃음이 나옵니다. 일본이란 나라는 정부와 국민 기자들이 모두 둥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뜻을 합쳐 무슨 모의를 하는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외국인들의 눈을 의식하며 힐끗힐끗 곁눈질하면서 말이죠.

 

반면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한 시도 가만 있지를 못합니다. 마냥 시끄럽고 힘이 넘칩니다. 그것은 때론 바람이 되어 높은 파도를 일으키고 그 위에 떠 있는 대한민국호는 좌로 기우뚱, 다음은 우로 기우뚱. 그 편차가 너무 커서 아주 한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슬아슬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정작 거기 사는 사람들은 좌우로 갈라져 서로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태평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며, 내가 이젠 이방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저들이 정말 옛 한국사람들인가 하는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여우도 죽을 때면 제가 낳은 곳을 향한다고 한국에 가서 살 의향도 가지고 갔었는데 막상 가보니 나는 이 보조에 맞추어 같이 살아갈 자신이 점점 없어집니다.

 

이제 한국 체류 감상을 써보려 합니다. 3주간의 짧은 기간이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적어도 장님이 한 가지 진실은 말했습니다. “야, 코끼리는 큰 기둥 같은 거야”하는 거 말입니다. 만일 질문이 "코끼리 다리는 어떻게 생겼을까요?"한다면 꼭 맞는 답이지요. 

 

(1) 늙은 말이 길을 찾는다. 

 

교직을 은퇴한 친구 부부와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친구 부인은 학교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은퇴하신 분입니다. 한국에 ‘전교조’라는 조직이 합법화된 이래 한국의 교권 추락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답니다. 불량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옆의 학생이 핸드폰으로 찰칵 사진을 찍어 그 자리에서 관계기관에 고발하고 그 사진을 SNS에 올려 만천하에 공개한답니다. 해당 선생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폭력 선생의 딱지가 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생이 살아남는 방법이란 학생들이 아무리 떠들고 법석을 떨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시선을 책과 칠판에 두고 (학생들이 듣든 말든) 자기 할 말 만하며 시간을 땐다고 합니다. 어차피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앞자리에 몰려 앉아있으니까요. 어떤 선생은 그 좁은 교실에 미니 마이크와 스피커를 가져와 사용하기도 한다니 도대체 교실이 어떤 분위기인지 상상이 가지를 않습니다. 

 

더 놀랄 일은 교과서에서 항일 투쟁의 상징이었던 유관순 누나(언니)의 이야기가 오래전 사라졌답니다. 왜냐고요? 유관순 누나는 당시 이화여대 학생이었고 이화여대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제국주의적 학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제국주의를 행한 미국이지만 한국 경우는 얼마나 다른가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유린하기 시작한 1800년대 말, 선교사들은 왕의 주치의와 국민들의 의사로, 애국자들의 은신처 제공자로 그들은 우리와 고통을 같이 했습니다. 서양 격언에 '밥 주는 손을 물어뜯는 개'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정통적인 교육을 받은 선생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하나둘 정년퇴직한 현재 젊은 선생들이 학교를 운영합니다. 늙은 선생님들은 이제 힘도 없고 말발도 서지 않는 현실이랍니다. 학교교육의 현실이 한밤중이나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형국으로만 보인답니다. 그래도 ‘늙은 말이 길을 찾는 법’인데 말입니다. 

 

(2) 한국인들은 수상하다

 

한국 체류기간 동안 저는 주로 강남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말 여기가 한국인가 하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랍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앞뒤 양옆을 둘러보아도 국산차보다는 벤츠, 아우디, 렉서스 비엠더불유 등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래전 내가 독일에 갔을 때 주위에 온통 독일차들을 보며, ‘아, 내가 정말 독일에 왔구나’ 실감했는데 지금 나는 어느 나라에 있는 것일까? 하기야 나도 그때 친척의 외국 차를 타고 있었으니 무어라고 더 말을 할 수가 없지만 말이죠.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승용차들의 유리창에 까만색 반투명 테잎을 붙여서 차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더군요. 외국차일수록 그 빈도가 더 심하게 보였습니다. 40년 전 제가 한국에서 살 때는 색안경을 낀 사람은 조금 수상한 사람들이었죠.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중앙정보부 직원, 헌병, 형사 등이 서민 겁주기로 애용했다고 기억이 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가뜩이나 까만 차가 많은데 차창마저도 깜깜해서 정말 대낮에도 캄캄절벽입니다. 

 

왜 저렇게 모두 까맣게 하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햇볕의 자외선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럴까? 한국은 이제 공업화와 중국의 황사 등으로 자외선에 대한 걱정보다는 먼지를 더 걱정해야 되지 않을까요? 외국차의 범람과 까만 창을 보며 나의 느낌은 한 마디로 ‘한국인들은 수상하다’ 였습니다. 재산이 있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무언가 자신을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아니면 주위의 덜 가진 자들을 아예 외면해 버리려는 죄수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요? 왜 있잖아요. 죄수가 형사 앞에서 심문받을 때 잠바로 머리통을 온통 감싸는 행동 말이죠.  

 

아무리 좋은 차라도, 아무리 까만 칠을 했어도 교외에 나가 교통순경의 눈길이 없는 것이 확실하면, <일단정지> 표지도, 빨간신호등도 그들을 세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행인들은 신호를 예쁘게 잘 지키더군요.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3) 시보다 더 시적인 통영 앞 바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통영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통영 소리가 나니 벌써 머릿속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고 점점이 섬들이 한가히 떠 있고 통통선이 V선을 그리며 섬 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묵었던 숙소는 통영 앞 바다와 섬들이 환히 내려다 이는 산정에 지은 호텔이었습니다. 커텐을 열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황홀경이었습니다. 큰 창 앞에 서서 장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시구 하나!

 

<섬은 바다가 쓰는 시>

 

나는 급히 몸을 돌려 여행 백을 열어 옷 사이 어디에 꽂아 놓았던 노트를 찾아 이 가장 저 가방을 뒤지고 펜을 찾고 하며 시간을 보내고 다시 창 앞에 서서 그다음 구절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이 북새통에 내 머리에서 시는 십 리만큼 달아나고 마치 절벽 앞에 선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언제나 필기도구를 몸에 달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좀처럼 실천이 되지를 않은 결과였습니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생각 같아서는 한가한 마음으로 하루 이틀 정도 바닷가를 거닐며 아침 점심 저녁 바다와 같이 생활하고 싶었죠. 틀림없이 바다가 다음 시구를 슬쩍 귀띔해 줄 것입니다. 나는 그저 받아쓰기만 하면 되겠죠. 하지만 어쩌나. 다음 날 아침에는 일찌감치 서울을 향해 떠나는 게 여정 계획이었습니다. 처음 떠날 때는 3박 4일 여행이었는데, 오면서 전주 한옥마을에서 비빔밥 먹고 순천 만국공원 주유하고 여수에서 일박, 다음 날은 남해의 독일인 마을과 각국 테마 공원을 구경하면서 또 일박, 이미 두 밤을 소진했거던요. 여행객이 남기는 것은 언제나 <아쉬움>뿐이지요. 

 

이 시를 완성하기 위해 저는 여기 통영을 다시 한번 방문하려고 합니다. 영화 <우체부>가 생각납니다. 칠레의 민족시인 네루다가 이탈리아 어촌에 망명지를 정했습니다. 각국의 애독자들에게 오는 편지가 매일 한 자루 가득합니다. 그를 위해 전용 편지 배달부가 채용되었는데 이 젊은 배달부에게 네루다는 시적 마음을 일깨우고 세상을 보는 눈도 틔워 줍니다. 바닷가에 데려가서 파도 소리를 듣는 법, 그 소리를 시에 표현하는 법, 그리고 연애편지를 써주고 애인에게 구애하는 법도 가르쳐주어 혼인도 성사시켜 줍니다. 

 

시인이 고국으로 떠난 다음에도 우체부는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의 소리 듣고 그 소리를 녹음하여 시인에게 보내주며 자기도 시를 씁니다. 그 이탈리아의 미항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곳이 통영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큰 수확인지요. 내 조국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어항을 가지고 있다니요. 아, 대한민국, 나의 조국. 

 

(4) 다람쥐 쳇바퀴에 엔진을 단다고 더 멀리 가나?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자랑하는 것이 길입니다. 전국 어디나 이제는 4시간대에 진입했고 그때 공식 뉴스가 한국인 2.5인에 차가 한 대라는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 서점이나 주유소에 가서 지도를 살 수가 없습니다. 하도 빨리 길과 터널을 만드니 매년 지도가 인쇄되어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 지도는 옛것이 된답니다. 그래서 인쇄업자들은 아예 지도를 출판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GPS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요. 그래도 이래도 되는가?

 

한 마디로 한국인들은 길을 뚫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렇게 길을 많이 만들면 농사는 어떻게 짓고 공장은 어디다 세우느냐?"고 물었더니 회심의 미소를 띤 대답이 즉석에서 나옵니다. "우린 길을 평지 땅을 희생해 가며 만들지 않아요. 산을 뚫어 길을 내니 생산에는 지장을 안 줍니다." 실제로 컴퓨터 화면에 펼쳐지는 길은 남북동서를 관통하는 수많은 길, 해변을 비잉 도는 길, 가로세로 바둑판같습니다. 

 

"국민 모두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대부분 놀러 다니는 사람 같은데 고속도로로 그렇게 빨리 가서 뭐 하죠?" 

"빨리 가서 더 많은 장소에 돌아다니고 빨리 오면 좋지 않아요?"

"가는 길에는 가드레일도 높은 데가 많고 빨리 달려야 하니 도중에는 아무것도 못 보겠던데요.“

"중간에 볼게 뭐 있어요. 빨리 가서 더 많이 보고 사진 찍고 빨리 집에 오면 되지."

 

많은 길이 이제는 주로 관광사업에 주안점을 두고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관광지를 많이 개발하는 것도 좋지만 관광지 가는 길(도중)에도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집 떠나는 마음의 가벼움, 꾸불꾸불 시골길을 식구들끼리 재잘거리며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가다가 배고프면 동네 식당에 찾아 들어가서 먹는 그런 여유로움은 다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지방 자치단체마다 자체 관광지를 개발하고 길을 뚫고 일찍이 듣고 보지도 못한 이상한 식단, 식당을 지어 관광객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스님들마저 그 파헤쳐지는 산간에 살던 풀, 나무, 동물, 벌레들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자제하자는 운동을 벌인다는 얘기를 이제는 듣지 못했습니다. 

 

국민 모두가 열심히 사는 듯이 보이지만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다람쥐가 쳇바퀴에 엔진 달아 돌린다고 더 멀리 가나?"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

정홍택 hongtaek.chung@gmail.com

작성 2022.11.18 11:43 수정 2022.11.1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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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