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미안은 한 개인이 가족과 사회, 지구, 우주와 바른 관계를 맺고자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해 봅니다. 코스미안은 별의 원소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이 우주의 무수한 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푸른 별, 행성 지구에서 이 시간과 공간을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순간순간 감격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의 과학은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도로 발달해서 유발 하라리의 ‘신이 된 인간’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생명과학과 우주의 생성 등에 대한 이해는 몇 세기 전의 인류의 이해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첨단 과학을 기반으로 한 사회 각 분야에서의 공학적인 응용과 실생활 속의 적용으로 인하여 각 개인은 과거의 어느 왕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힘의 양면은 너무나 극적이어서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을 파괴할 수도 있고 생명이 살기 좋은 청정한 낙원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파리기후협약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성공적이었지만 참가국들이 약속한 탄소감축목표량 모두를 합산해도 세기말 지구 기온은 산업혁명 이전보다 7도 상승합니다. 인류 사회는 2도 이상의 지구환경에서 지탱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7도 상승된 지구환경에서는 형성조차 불가능합니다. 인류 사회가 견딜 수 있는 마지막 온도는 1.5도 상승입니다. 이것은 파리기후협약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턱없이 넓은 간극을 어떻게 메꾸어야 할까요? 인류가 이것을 메꿀 의지나 있는지요?
인류 역사 속에서 종말론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이번의 종말론은 그전의 종말론과 다릅니다. 이번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입니다.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사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 무지개는 신의 계시가 아니고 물방울에 부딪힌 빛의 굴절현상이라는 것은 과학이 밝혀낸 과학적 사실입니다.
과학이 ‘기후변화는 인류가 초래한 것이고, 인류는 제6차 대량멸종시대를 열었고, 그로 인해 인류는 다른 생명종과 함께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도 과학이 예견하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황망한 미래, 아니, 내 자식들의 미래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것. 그 세상은 단순히 알지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 기후가 요동쳐서 폭풍과 홍수, 가뭄, 산불, 등이 일상이 되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항시적 유목민이 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세상. 사실, 우리들에겐 이러한 세상을 정면으로 대할 심리적 근육이 없습니다. 다만, 두려움이고, 설마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요? 그냥 세상의 종말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그때까지 살지 않을테니 나 죽으면 그만이지’ 할까요? 아니면 ‘나는 신앙이 돈독하니 예수님이 우리를 기후변화에서 구원하려 오실 테니 그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 되겠지’ 할까요? 우리가 나은 자식들이 자신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의 세상이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울 때 그들의 심리상태는 어떨까요?
자본주의에 중독된 21세기의 인류는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그 중독현상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중독현상이 오늘의 기후변화를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술적인 편리함을 버리기에는 우리는 자연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시대적인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정신 혁명 없이는 자연파괴에 무감각해진 중독된 의식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듯합니다.
기후변화는 우리 삶의 철학이 되어 온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다’는 인본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기후 위기는 나와 사회, 나와 자연, 나와 우주, 나와 지구생태계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들과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지구생태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나의 삶과 죽음은 다른 생태계의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 등의 사유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인류에게는 이 질문들이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고 생존을 결정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후는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 역사, 지성, 예술,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담는 바구니입니다. 그 바구니에 구멍이 났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이 바구니는 곧 해체될 것입니다. 바구니에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과학적 증거로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의 원인이 된 산업사회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 가난한 나라들은 선진국의 국민들과 우리의 일상에서 배출한 탄소로 삶의 터를 잃고 나라를 잃고 난민이 되는 사실에 대한 도덕적 인식도 있어야 합니다. 유엔은 이미 환경난민을 돌볼 수 있는 재력이 소진된 지 오래입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의 자식들의 운명도 이들과 같아질 수도 있음을 예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코스미안의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기후환경 위기를 사유하고 내재화하여 그 해결 방법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찾아가야 할 의무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세대야말로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초래하고 또한 이 위기로 죽어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과 자원을 세계는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절실함과 위기의 강도를 인류 각자가 인식하지 않을 뿐입니다. 방법과 자원이 있어도 그것을 활용화하여 생활 속에서의 적용을 이루어내는 엔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엔진을 우리 각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정신이라는 엔진입니다. 인간 정신의 힘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류세라고 불리는 대량멸종시대를 멈추고 기후변화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상의 힘입니다. 꿈을 꾸는 힘입니다.
우리가 꾼 꿈은 창조라는 형태로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인류 역사는 증명해 왔습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창조도 없고 우리의 현실 속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다만 개인의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어야 합니다. 이 일을 코스미안들이 해 주어야 합니다. 한가지 꿈, 지속가능한 세상에 대한 꿈을 꾸는 일이 사회현상으로 퍼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한국이 아니고 한 국가가 아니고 세계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팬덤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이 그 시발점이 됩니다. 한 개인에게 내재화된 사유는 그의 일상의 루틴 속에 녹아 들어가서 퍼져나가면서 세상을 구원하게 됩니다.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아서 절망적입니다.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이 절망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두 개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위에서 서술한 정신의 힘입니다. 인류 역사는 증명합니다. 언제나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 새 역사를 써왔음을. 또 하나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자식을 구해내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기후변화의 폭풍이 저만치 와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빨리 달려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절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자식을 구하는 일을 하고야 맙니다.
코스미안은 이 시대가 이대로 가다간 종말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가 되기도 해야 하지만 절망을 넘어 나아가는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전문가로 한 시민으로 일상 속에서 그 길을 찾기 위하여 희망을 찾는 사람입니다. 코스미안은 아무리 가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으면 그것을 등불처럼 높이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 등불은 다른 등불을 든 코스미안을 찾게 합니다.
등불은 더 밝아지고, 그러면 우리는 지속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 지속가능의 길을 찾아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모이고 거듭하면 그 길은 넓어지고 우리들의 꿈은 현실이 됩니다.
[김은영]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석사
오크라호마주립대학 박사과정
시납스인터내셔날 CEO
미국환경청 국가환경정책/기술 자문위원
Email: kimeuny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