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금단(禁斷)의 땅, 임진강변 생태 탐방로를 걷다

여계봉 선임기자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이라 더 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자유로에서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마냥 들뜬 여느 나들이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다. 1번 국도 통일로와 77번 자유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임진각에 가면 특별한 길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시작해 율곡습지공원까지 이어지는 9.1km의 길은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 민통선 지역이다. 

 

철책 사이로 난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기자 일행이 가기로 예정된 탐방일 이틀 전, 연일 계속된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민통선 상황이 좋지 않아 탐방이 취소되었다는 문화해설사의 전화를 받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컸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탐방이 가능해졌다는 전화를 다시 받고 약간은 들뜬 심경으로 임진각으로 달려간다.

 

듣기만 해도 가슴 저며오는 '민통선'이란 용어는 지구상에서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희귀한 단어다. 반세기 이상 남북을 두 조각낸 이 '이념의 길'은 한민족이 끊임없이 갈망하는 자유와 평화의 길임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임진각에 도착해서 평화의 종 앞에 있는 생태 탐방로 안내사무소에서 신원을 확인한 후 주의사항을 전해 듣고 강가로 내려서니 삐거덕거리며 철문이 열리고서야 그 먹먹하고 신비한 길에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임진각 평화의 종 앞에 있는 생태 탐방로 안내사무소

 

이제는 파주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란 이름으로 불리며, 탐방로 좌우로 철마다 진달래와 달맞이꽃, 구절초 등 알록달록 야생화를 피고 지운다. 그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던 지역이라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를 유지한 덕에 여러 종류의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 동물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 불운한 역사가 낳은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아닌가.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코스(파주시청 제공)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9.1km 구간은 과거 군 순찰로로 활용되던 출입제한 구역이었으나, 2016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연간 1만 명이 방문하는 탐방로로 거듭났다. 임진각 통문에서 통일대교를 지나 율곡습지공원까지 이어지는 생태 탐방로 코스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탐방로 왼쪽 철책선 너머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함경남도 마식령산맥 자락에서 시작해 서해까지 흐르는 남한에서 4번째로 긴 강. 삼국시대부터 조선, 현대까지 유난히 치열한 전쟁의 역사를 흐른다. 

 

1998년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을 기념하기 위해 통일대교 아래에 세운 조형물 

 

분단의 아픔과 상징인 휑한 철책에 스산한 바람만이 오간다. 뜻있는 예술가들이 무채색 차가운 철책선에 알록달록 색을 입히고 온기를 불어넣어 희망으로 감싼 에코뮤지엄 거리를 지나면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 마음도 포근해진다.

 

차가운 철책에 희망의 온기를 전해주는 에코뮤지엄 거리

 

탐방로 왼쪽에는 봄에는 질경이와 쑥, 오디, 여름이면 산딸기와 강아지풀, 가을이면 구절초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고 겨울이면 독수리와 재두루미 등 철새들이 길동무가 되어 준다. 늦가을이 한창인 오늘은 철책 오른쪽으로 쇠기러기와 두루미들이 평화롭게 쉬고 있고 고라니가 유유자적 걷고 있다. 싸늘한 철책을 경계로 조용하고 풍요로운 자연의 품에 풀썩 뛰어들고 싶은 날이었다.

 

금단의 땅에서 평화를 누리며 걷는 사람들

 

무성한 갈대가 흐드러지게 핀 강변을 따라 걸으며 동행하는 문화해설사들이 임진8경과 강 건너 고구려의 덕진산성, 철새들의 낙원 초평도, 임진나루 등 명소들에 관해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 탐방로를 걷는 동안 중간에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체력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만 도전하는 것이 좋다. 혹시 걷다가 몸이 좋지 않으면 트레킹 내내 일행을 따라오는 긴급 구호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탐방로 중간에 만들어진 전망대 4곳에서는 민통선 북방의 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퇴적해 만들어진 습지인 초평도는 두루미, 쇠두루미, 큰고니, 저어새 ,독수리 등 철새들이 쉬어가는 낙원이다. 무인도인 이곳은 겨울에는 회색 몸에 뺨 주위가 붉은 두루미를, 여름에는 주걱같이 생긴 검은 부리의 저어새를 자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토끼나 고라니처럼 크고 작은 들짐승을 만나기도 한다.

 

철새들의 낙원 초평도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기 위해 도착한 임진나루는 맑은 날인데도 산자락이 안개 속처럼 아득하다. 패주(敗主)가 되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야밤에 작은 배를 엮어 만든 부교를 지났던 군주의 처참했던 심경을 보는 듯하다. 지금도 임진강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의 생업터전인 임진나루를 지나서 야트막한 산을 넘으면 여정의 마지막인 율곡습지공원에 다다른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과 임진나루

 

버려졌던 습지는 주민들의 손으로 살아나 코스모스의 향연으로 황홀하다. 너른 꽃밭이 바라보이는 공원 한쪽에 있는 초가집의 나지막한 울타리를 타고 넘은 감나무 가지마다 까치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생태 탐방로 9.1㎞가 짧게 느껴진다면 근처에 있는 화석정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율곡습지공원에서 92번 버스를 타고 율곡2리에 내리거나 율곡2리 방향으로 20여 분 걸어가면 화석정이 나온다. 화석정(花石亭)은 율곡 이이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다. 생전 건물이 상하지 않게 들기름을 발라두었는데, 죽음을 앞두고 이항복에게 비서(祕書)를 전하는데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면 읽어보라고 했다. 8년 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임진나루를 지날 때 동행했던 이항복이 율곡의 비서를 꺼내 읽어보니 ‘화석정을 불태워 임진강을 환하게 밝혀라’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화석정 왼쪽에는 7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충신의 절개를 지키고 있다.

 

율곡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했던 화석정

 

율곡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했던 화석정에서 철책선 너머로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치열한 전쟁의 역사가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본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남북의 현 상황이 도도한 임진강 강물처럼 잘 흘러가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민통선이 되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화석정에서 철책선 너머로 바라본 임진강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는 평일과 주말(수요일~일요일)에 개방하며, 참가를 희망하는 경우 생태탐방로 홈페이지(http://pajuecoroad.com)에서 참가신청을 하거나 031-940-4726로 신청하면 된다. 하루 150명까지 입장이 가능하며 탐방 1주일 전까지 신청을 해야 하고, 탐방일 당일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yeogb@naver.com

 

 

 

작성 2022.12.01 10:40 수정 2022.12.0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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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