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우린 모두 ‘삶의 예술가(The Artist of Life)’ 코스미안이어라

이태상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Politics is the art of the possible.) 정치는 수학 같은 과학이 아니다. (Die Polik ist keine exakte Wissenschaft.) 정치는 예술이다. 정치는 예술, 곧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술이다. (Die Polik ist die Lehre vom Mo”glichen.)”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의 말이다.

 

자고로 인생의 순례자(巡禮者)들은 모두 영국의 대법관이며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1478-1535)의 공상적(空想的) 이상향(理想鄕) ‘유토피아(Utopia, 1516)의 신기루(蜃氣樓)를 보면서 쫓고 있으리라. 이 잡히지 않는,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를 좇다 기진맥진 지쳐 숨진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리라.
 
그러나 때로는 신기루 같은 이 환상적(幻想的) 환영(幻影)이 잠시 현실(現實)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현실이란 것 자체가 일종의 환상(幻像/幻想/幻相)이라면 환상이겠지만.
 
그 한 예로 폴란드(Poland)의 경우를 들 수 있으리라. 동서(東西)로 갈린 양극(兩極) 사이에 위치한 나라 (그 나라 이름부터가 그렇다면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가 근년에 계속 뉴스의 초점이 되어 온 것처럼 상반(相反)되는 양극 사이에서 고뇌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 화면을 통해 사실적(事實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881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영화로 선정돼 금상을 획득한 폴란드의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1926-2016) 감독의 ‘철의 인간(Man of Iron)’은 허구와 현실이 전적으로 통합된 ‘역사 그 자체’라는 평을 얻었다. 폴란드의 대표적 감독의 한 사람인 안제이 바이다가 감독한 이 영화는 1980년 일어난 그단스크 스트라이크를 배경으로 그가 1976년에 제작 감독한 영화 ‘대리석 인간(Man of Marble)’의 속편(續篇/續編)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그 당시로) 지난 35년간의 폴란드 역사를 개관한 서사시(敍事詩)로서 세계 2차대전 직후의 낙관적 희망이 1950년대 스탈린 공포 시대를 겪고 냉소적(冷笑的)인 부정부패로 무산(霧散)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1940년 정부 당국이 생산 목표를 초과 달성토록 노동자들을 독려(督勵)키 위해 한 벽돌공을 ‘충격 요원’ 모범 노동자로 뽑아 국민의 영웅으로 추켜세워 이용한 후 그를 반동으로 몰아 그는 투옥되었다가 행방불명이 된다.
 
‘대리석 인간’에서 이 벽돌공의 생애를 한 젊은 TV 방송 여기자가 추적(追跡)한다. 그리고 ‘철의 인간’이 이 스토리를 이어간다. 심층 취재에 나선 이 여기자는 도처에서 침묵의 벽에 부딪힌다. 그러다 실종된 노동자의 아들을 찾게 되고 방송국에서 해고되며 그 아들과 결혼한다. 여기자가 찾던 노동자 영웅은 1970년 그다니아 의거 때 사살된 것을 알게 된다.
 
독학(獨學)한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와는 다른 배경과 견해를 갖고 아들은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장 노조 파업을 주도한다. 한편 비밀경찰의 사주를 받은 알콜중독자인 라디오 방송기자가 이 파업 지도자에 대한 흑색선전을 편다. 파업과 파업을 야기시킨 일련의 사건과 파업의 종국적인 승리가 등장인물들의 관점에서 조명(照明)되고 있다.
 
1970년 파업 현장을 몰래 찍은 뉴스 영화 필름이 어느 한 파업 노동자를 경찰이 구타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구타를 중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후 폴란드 정치 경제 개혁의 주역이 된 자유노조 지도자로 처음으로 실시된 민주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한 레흐 바웬사(Lech Walesa, 1943 - )도 등장, 이 영화의 주인공 결혼식에 증인으로 사회를 본다.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이 감동적인 영화는 예술과 역사를 하나로 통합한 걸작 명화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안제 바이다의 동적(動的)인 드라마에 비해 그의 후배 크지스토프 자누시(Krzyhsztof Zanussi, 1939 - )가 감독한 영화 ‘불변수(The Constant Factor, 1980)’는 실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일반 도덕 윤리적인 문제들을 냉철하게 분석한 작품으로 1980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제목 ‘불변수(不變數)’는 이 영화의 주인공 젊은이가 여가에 하는 공부인 수학적 개념일 뿐이 아니고 마르크스주의 윤리에 집착한 사회에서 변치 않는 어떤 항구적인 도덕적 가치 기준을 추구하는 그의 집념을 뜻한다. 이 영화는 1980년 파업 사태를 통해 드러난 사회의 도덕적 파산 상태를 부각시킨 역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불장군처럼 부패한 사회 풍토에서 개선될 희망이 없지만, 타락을 거부하고 있다.
 
직장을 얻으려면 또 죽어가는 가족을 병원에 입원시키려면 꽤 영향력 있는 배경이나 연줄 아니면 상당한 뇌물을 제공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젊은이는 알게 된다. 전시 광고 대행 회사 직원인 그는 그의 동료들이나 상사가 모두 제 직무 수행보다 각자 제 뒷주머니 챙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동조하지 않는 그는 결국 희생되고 밀려난다. 수학적인 은유(隱喩)를 계속 음미(吟味)하면서 젊은이는 그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보고 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카오스의 혼돈과 암흑세계를 지나 비로소 도달할 밝고 아름다운 우주 코스모스를 쫓는 코스모폴리탄 아니 코스미안의 궁극적인 비전은 찬란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 순례자의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진로 지로역정(地路歷程)은 마침내 보람차고 황홀한 천로역정(天路歷程) 우로역정(宇路歷程)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정녕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이렷다. 양자 간에는 무한한 거리가 개재한다. 하늘이 땅일 수 없듯이 땅이 하늘일 수는 그 더욱 없으리라. 신(神)은 하늘에서 살고 동물은 땅에 산다면 신과 동물의 튀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할까?
 
모든 인간은 땅을 밟고 산다. 현실을 초월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기에. 그렇지만 얼굴만은 하늘을 우러러 살아야 하리라. 이것이 인간 된 도리(道理)이리라.

진실로 이상은 정말 실현될 수 없는데 그 의의가 있을는지 모를 일이어라. 하늘이 끝도 한도 없이 높은 것처럼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함으로씨 인간은 한없이 노력하고 따라서 계속 발전 향상할 수 있을 테니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1917-1945)처럼 우리 모두 하나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염원하고 기원하면서 말이어라.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and 1916-1996)이 한 말처럼
 
“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뿌리가 비옥한 땅속에 있어야 한다. 만일 머리와 가지만 있고 뿌리가 없다면 공허한 헛소리나 반복할 뿐,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이처럼 건전하고 건실한 철학을 가진 대통령을 뽑을 수 있을 만큼 현명하고 자유로운 프랑스 국민이 부럽다. 어느 나라고 그 나라 국민 민도와 수준만큼의 정부와 지도자를 갖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 우리나라에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지만 용이 날 만큼 깨끗한 개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밑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지 않겠는가?
 
그 언젠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 전(前) 소련 연방 8대 (최후 마지막)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소문에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에게는 백 명의 애인이 있다. 그중 하나가 에이즈균 보균자인데 그게 누구인지 모른다.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는 백 명의 경호원이 있다. 그중 하나가 테러리스트인데 그게 누구인지 모른다. 나에게는 백 명의 경제고문이 있다. 그중 한 사람만 똑똑한데 그게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925- 2013) 영국수상(1979-1990)이 한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정치에서는 말이 필요하거든 남자에게 청하고, 행동과 실천이 요망되거든 여자에게 부탁하라. (In politics, if you want anything said, ask a man. If you want anything done, ask a woman.)”
 
이처럼 유머와 센스가 풍부한 고르바초프 같은 지도자와 대처 같이 신념대로 행동하는 여성 정치가가 우리 한국에도 어서 나왔으면 그 얼마나 좋으랴!
 
지난 2016년 미대선 후보 토론 때 힐러리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 트럼프에게 ‘미국 국민 모두가 다 내는 세금을 당신은 왜 내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트럼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난 똑똑해서다. (Because I am smart.)”
 
또 그 언젠가 나는 이런 농담 같은 사실인지, 사실 같은 농담인지를 아주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다.
 
시골에 사는 어떤 노인 내외가 모처럼 서울 구경을 갔다왔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모인 동네 어른들보고 말했다.
 
“여보게들, 내가 그 약삭빠르다는 서울 사람 뺨을 치고 왔다네. 글쎄 내가 까마득하게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어떤 서울 사람이 돈을 내고 그 건물을 쳐다봐야 한다며 몇 층까지 올려다보았느냐고 묻길래, 내가 쳐다보기는 그 꼭대기 층까지 올려다보았지만 시침을 떼고 10층까지만 보았다고 대답했더니 그 서울 사람이 그만 내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10층 본 값만 내고 왔다네.”
 
한편 할머니는 안방에 모인 안노인네들보고 말했다.
 
“아, 글쎄 영감이 겁도 없이 거짓말을, 그것도 서양 선교사들이 입는 검정색 겉옷을 입은 간수 같은 사람에게 하길래, 난 그만 간이 콩알만 해져서 어쩔 줄 모르다가 날더러는 몇 층까지 올려다보았느냐 묻길래, 본대로 꼭대기까지 보았지만 그 꼭대기 층까지 본 돈을 낼만큼 노자가 없다고 사정하자, 그 사람이 정말 친절하게도 ‘오, 주여! 지상엔 평화를, 하늘에는 영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성부-성자-성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탕감해서 그 건물이 100층짜리인데 그 십 분의 일, 10층만 본 것으로 해 줘 10층 본 돈만 내고 왔지라오.”
 
중세 유럽 교회가 교구민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십일조(十一租)란 것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자기 수입의 10분의 1을 헌납하는 것을 십일조라 하지만, 이러한 세금(?)이나 천당 클럽 회비(?)나 (저만 복 많이 받겠다고 하나님 또는 부처님께 바치는) 뇌물(?) 같은 헌금/시줏돈을 교회나 절에다 바치느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바치는 것이 훨씬 더 뜻있고 보람찬 일이 되지 않을까.

 

몇 년 전 뉴욕 시내에는 곳곳에 아주 인상적인 포스터가 나붙었었다. 에칭 식각법으로 부식한 동판화로 만든 예수 상반신 그림에 다음과 같은 광고 문안을 넣은 것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일요일에는 ‘집 없는 자’를 숭배 또는 그에게 예배를 드리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그를 못 본 체 무시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집 없는 자’란 두말할 것 없이 신약 성서 <마태복음 8장 18절에서부터 20절까지>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비유해 말했다는 예수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포스터는 피터 코헨(Peter Cohen)이란 한 예술가가 수많은 뉴욕의 집 없는 홈레스(Homeless) 노숙자(露宿者)들을 돕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오늘 아침(2020년 11월 3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실린 장소현 미술평론가-시인의 문화산책 칼럼 ‘난민 구조에 나선 예술가’에서
 
“현재 활동 중인 미술가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양하겠지만 나는 우선 영국의 그래피티 작가 뱅크시를 꼽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뱅크시의 작품은 우리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한다. 우선 작품이 있는 곳이 길거리라서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 권위적인 미술관이 아니다. 그리고 작품 내용이 누구나 보면 금방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기발하지만 친숙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풍자와 해학, 유머로 이야기 한다.”
 
우주 나그네 길손으로 이 지구별에 잠시 들린 우리가 주어진 인생 삶을 각자 창조적으로 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이 있을 수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 축복 된 삶을 사는 ‘삶의 예술가’ 코스미안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2.12.03 10:52 수정 2022.12.0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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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