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부여 무량사에서 만난 매월당 김시습

여계봉 선임기자

해 저무는 산사 오르는 골짜기는 깊고 어둑하다. 빛깔도, 움직임도, 소리도 모두 지운 채 적멸처럼 잠잠하다. 고요한 초겨울의 산골짜기 끝. 하늘을 가린 나무들의 차양이 물러난 청명한 둔덕에 무량사가 있다.

 

채웠던 것들을 비워내는 계절에 산사를 찾아온 셈이다. 절이 마음을 비우는 곳이라고 한다면 잎 떨군 나무들의 군상(群像), 그 허심(虛心)한 풍경이 있는 계절에 절을 찾는 것이 어쩌면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 부여 서쪽에 있는 만수산은 그리 높지도 않으면서 충청도 특유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잘 녹아있는 산이다. 산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기암괴봉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우며 숲이 짙은 수더분한 산이다. 이 산자락에 터 잡은 무량사. 무량(無量)이란 셀 수 없다는 말의 한 표현으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라고 할 때 일주문을 지난 우리는 속계에서 선계로 들어선 거나 마찬가지다.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극락교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500여 년의 세월 저편에서 부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조선 초기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의 호는 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설잠(雪岑)으로, 1435년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던 김시습은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라고 해서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졌으며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해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우다가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여기 무량사였다. 김시습은 여기서 59세에 눈을 감았다.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 높이 2.84m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8각 원당형 부도다.

 

만수산 너른 품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국사가 머물렀다고 하는데, 고려 고종 때 크게 중창을 하여 요사채 30여 동과 산내 12개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절이 불타버리고 조선 인조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왕문 오른쪽에 있는 고려시대 당간지주

 

천왕문 너머에는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나 하는 궁금증을 안기면서 천왕문 돌계단을 지나 앞쪽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층집 극락전과 휘어진 소나무, 석등, 오층석탑이 어우러진 모습이 하나의 액자가 되면서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유명한 화가가 그림을 그린 것처럼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석등과 오층석탑, 극락전이 일직선상으로 보이면서 오른쪽으로는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으면서 적당하게 비켜난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딱딱한 절집 인상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풀어준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무량사 마당. 한 폭의 그림이다.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석등의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무량사 석등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오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은 창건 당시부터 이 절을 지켜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완만한 지붕돌과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룬 채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모습의 처마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들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무량사 오층석탑과 석등

 

무량사의 본전인 보물 356호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외관으로 2층 구조이나 내부는 위아래가 트여 있는 이른바 통층 구조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극락전을 기준으로 여러 전각들이 배치돼 있는데 산재해 있으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조화롭게 보인다.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불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광명을 주는 부처라는 뜻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로도 부르는데, 사찰 이름을 무량사라 부른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대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무량사 경내에는 여러 전각이 있지만 매월당 김시습(1435-1493)과 인연이 깊은 전각이 있다. 경내의 영정각에는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저자이고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한 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라면서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해 공과 실천을 쌓았더라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평생을 애석해하였다.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 

 

설잠(雪岑)’이라는 법호를 쓴 김시습은 시대와 불화했던 체제 밖의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속인인 듯 승려인 듯 부평 같은 삶을 산 문사였다. 그는 이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 길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싶었던지 병든 몸으로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이곳 무량사였다. 드센 찬바람에 영정각 문풍지가 소리 내어 울고 있고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자화상이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

 

산그늘이 접히는 저녁 예불 시간, 만수산 산색이 이미 검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갔다가 다시 오리라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겨 일주문을 나설 때 매월당의 시 월야우제(月夜偶題)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옛 무량사 절터 

 

뜰에 가득한 가을 달 흰빛 창창하고

외로운 불빛 사람은 말이 없고 밤은 깊어간다

살랑거리는 바람 맑은 서리에 잠은 오지 않고

종이창의 발그림자에 부처 마음 이는구나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yeogb@naver.com

 

작성 2022.12.08 11:20 수정 2022.12.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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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