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 집은 참 행복 하겠다’ 싶은 집도 있지만 기실 알고 보면 그 집도 남모르는 걱정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연애 시절 달콤했던 우리의 감정은 결혼한 후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부부는 어쩌면 이렇게도 맞는 게 없을까’ 싶을 때도 많다.
그런가 하면 옆집 키 작은 총각은 키 큰 처녀와 혼인하여 잘살고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겁(永劫)의 긴 세월을 두고 조금씩은 흐트러질 만도 한데 자연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다가오고 시절인연이 다하면 떠난다.
피투성이로 태어나 나이도 조금 먹고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깨달음이 뭘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부처님, 예수님처럼 거창한 깨달음은 아니겠지만 범부(凡夫)에게도 작은 경험과 생각들이 모여 아주 작은 깨달음을 느낄 때도 있는 것이다. 혼밥을 할 때도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며 손을 모으는 것과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좀 더 자연과 가까워진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작은 깨달음은 ‘다양(多樣)의 조화’였다.
그러면서 자연의 ‘섭리(攝理)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깊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연이란 것이 올 듯하다가도 가버리고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올 때 그것도 곧 섭리의 한 줄기이다. 오늘도 눈 뜨고 있음에 감사하며 아침은 아침대로 고맙고 저녁은 또 저녁대로 고맙다. 그런가 하면 ‘파도가 없으면 그게 무슨 바다냐’고 말하듯 삶에는 숱한 오르내림이 있다. 그런데 그 아픔은 생명체뿐만 아니고 무생물도 아픔을 느낀다. 돌멩이도 발길에 차이면 아프고 다리(橋梁)도 무거운 것들이 지날 때마다 낑낑거리며 버티다가 어느 순간 힘이 다하여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곧 무생물도 아픔과 수명(壽命)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맹목적 섭리주의자(운명주의자)로 살자는 얘기는 아니다. 무슨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정리가 되는데 굳이 조급하게 서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같이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원하던 대로 되지 않고 엉뚱하게 될 때도 있는데 얼마만큼 지나고 보면 의도치 않았던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있을 때도 있다. ‘이게 뭐야?’랄 때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자연의 섭리 안에서 그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횡재(橫財)를 만나면 언젠가는 횡액(橫厄)을 당한다. 로또 당첨자들의 대부분이 불행해지는 것을 보면서 돈은 어두운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모든 소유물(財貨)은 잠시 맡겨진 것임을 알게 된다. 본래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가 되면 반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 그림자처럼 따라가는 것은 그가 생전에 닦은 업(善業, 惡業 모두)이고 그것은 이다음의 생(삶)을 이룬다고 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앞으로는 가급적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다. 말을 줄이고 화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내가 겸손함을 조금 알게 된 것에는 빚이란 것이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빚도 고마운 존재다. 그러니 부부간 성향(性向)이 다른 것도 서로의 장점을 접목하기 위한 것이고, 시련이 다가와서 나를 깨어있게 하는 것도 역시 큰 고마움이다. 오늘도 읽고 있는 책은 나의 앎(지식, 경험)이 부족해서이니, 생물학적인 배고픔이 올 때는 심리적 배고픔도 생각하라는 것임을 알자.
영적언어(靈的言語)의 동의어는 엉뚱하게도 바디랭귀지(body language)이고 스킨십(skinship)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가치의 기준이 가장 원초적인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호의존의 원리와 질량불변의법칙, 이 둘의 조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어떤 작은 이룸도 땀 흘려 온 과정이다. 그러니 결과와 과정을 나란히 놓자. 그러면 결과를 이루었다고 자만하지도 않고 과정을 이루어 낸 자신을 토닥여 줄 수도 있다. 이것도 섭리 중의 하나이다.
부족함 많은 나에게 온 아주 작은(나에게는 귀한) 깨달음을 느끼면서 누구든지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 친구는 보고 싶으면 찾아가고. 여의찮으면 전화하여 안부 물으면 되니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와 같이 간다. 동행은 축복이다. 멀리 갈려면 같이 가라고 하는 말만 보아도 그것이 행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같은 돼지라도 돼지새끼보다는 새끼돼지라고 부를 것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기분 좋게 말이다. 사람도 불러주는 대로 그렇게 된다고 하니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크든 작든 깨달음이란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다가 어느 한순간에 온다. 물론 그전까지 수면(水面) 아래에서 수많은 백조의 물갈퀴 질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나에게로 오니 얼마나 행운인가? 아주 작지만 이 나이에라도 깨닫게 되었으니 고마움을 온몸에 안고 지금부터라도 좀 더 말랑말랑하고 진솔하게 살고 싶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