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해탈시解脫詩

이태상

1997년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다. 멕시코 톨텍Toltec 인디언의 지혜를 모은 책 ‘네 가지 동의서同意書 The Four Agreements: A Practical Guide to Personal Freedom’이다.
 
저자 돈 미겔 루이스(Don Miguel Ruiz, born in 1952)는 영적 지도자 가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외과의사가 됐다가 어느 날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하고 영혼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마야족의 뒤를 이어 등장한 토착 아메리칸 인디언의 지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네가지 동의서란 The Four Agreements are:
 
1. 네가 쓰는 말을 엄선嚴選하라. Be Impeccable With Your Word.
2. 아무것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Don't Take Anything Personally.
3. 가정假定해서 속단速斷 단정斷定하지 말라. Don't Make Assumptions.
4. 언제나 네 최선을 다하라. Always Do Your Best.
 
이 넷 중에서 특히 셋째 항목에 주목해보리라. 1960년대 내가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 THE KOREA TIMES 기자로 근무할 때 수습기자로 입사한 여기자가 있었다. 교정부를 거쳐 편집부로 올라온 이 아가씨가 그 당시로는 상상 밖의 농담 조크를 연발한다는 말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한 예로 이탈리아 여배우 실바나 망가노(Silvana Mangano 1930- 1989)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퀴즈를 내기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0할 년 0할 년’이란 정답正答(?)을 내놓더란 것이다. 외모부터가 청초하고 순진해 보이며 대학을 막 졸업한 이 아가씨가 그런 쌍소리를 했을 리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그 진위眞僞를 내가 직접 확인해봐야겠다고 작정해, 좀 덜 바쁜 아침 시간에 회사 근처 중앙청 청사 건너편에 있던 ‘설매다방’으로 이 아가씨를 불러냈다.
 
이 다방에선 신청곡을 받아 틀어줬었다. 이 여기자를 내 맞은편에 앉히고, 양옆에 동료 남기자 한 명씩 앉혔다. 혹시라도 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답도 듣기 전에 아가씨가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차를 주문하고 나서 나는 신청곡 하나 적은 종이쪽지를 D.J.창구로 밀어 넣은 다음 자리로 돌아와 내가 신청한 곡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가 신청한 곡이 나왔다. 이 곡은 1958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뉴욕 출신 보컬 그룹 ‘작은 앤소니와 임피리얼스 Little Anthony and the Imperials’가 부른 ‘쉬미 쉬미 코 코 밥 Shimmy Shimmy Ko Ko Bop’이란 노래였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정색正色을 하고 내 맞은쪽에 앉아있는 아가씨를 보면서 물어봤다.
 
“oo씨-입, 씨-입 할 줄 아세요?”
 
아, 그랬더니 눈도 깜짝 않고 즉각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건 내가 사람이냐고 묻는 거와 같지 않나요?”
 
우리 세 남자는 또 한 번 더 크게 놀라 할 말을 잃었으나 나는 내심 소문난 농담의 진위를 밝힌 것으로 만족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아빠나 오빠 아니면 선배 입장에서라도 한 마디 꼭 해줘야겠다고 별렀다.
 
나는 군에 갔다 와서 마련한 조그마한 집을 안채는 전세를 주고 문간의 단칸방을 쓰고 있었다. 이 단칸방으로 다방에서 망을 섰던 동료 기자 한 명과 이 아가씨를 밤늦은 시간에 초대했다. 그러면서 나는 진심으로 타일렀다.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어떻게 그토록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내 쌍스러운 질문에 응답할 수 있으며 신문사 사내에서 남성 기자들한테 쌍시옷 자字가 들어간 농담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 하는 말이 자기는 내 질문을 ‘슬퍼할 줄 아느냐?’로 들었고, 실바나 망가노 농담은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늘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에 ‘씹’이 그렇게 쌍스러운 말인지 몰랐었다는 것이었다.
 
아뿔사, 오호嗚呼, 애재哀哉라! 이토록 순수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천사 같은 아가씨의 동심童心과 동정童貞을 의심, 모독冒瀆하고 모욕侮辱하다니…
 
그 당시만 해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통금이 되어 아가씨는 우리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옷을 입은 채로 누워 하룻밤을 지냈다. 그 후로 나는 이 아가씨와 잠시 사귀던 중 취중에 다른 아가씨와 ‘사고’ 치는 바람에 사고 친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 아가씨는 그날 밤 내 단칸방에서 셋이서 밤을 함께 보낸 동료 기자와 결혼을 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이 친구는 날 친형처럼 따랐었다. 경기중, 경기고를 나와 서울법대를 졸업한 그는 자기가 여성이었으면 좋았겠다고 했다. 그랬었다면 우리 둘은 완전무결한 부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다른 ‘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내게 결핍한 모든 이지적인 이성과 지성을 자기가 갖고 있는 반면에 제가 갖고 있지 못한 감성과 열정과 용기를 내가 다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일담으로 그는 사고치는 바람에 나와 결혼까지 했다가 헤어지게 된 내 첫 부인을 처음부터 좋아했었는데 내가 이 여자와 결혼하게 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나와 사귀던 ‘실바나 망가노 농담’의 주인공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청와대 민원담당 비서관을 지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이 순수한 ‘소녀’를 속단했듯이 지레짐작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은 옛날부터 있어 온 것 같다. 공자도 탄식했다는 일화를 소개해보리라.
 
안회를 의심하는 실수를 저지른 공자의 탄식
 
공자가 제나라로 가는 도중에 식량이 떨어져 7일 동안이나 굶게 되었다. 공자는 한 마을 입구에 도착해 잠시 쉬는 동안 피곤함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잠결에 어디선가 밥 냄새가 풍겨와 눈을 뜨게 되었다. 나가 보니 제자 안회가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안회가 밥솥에서 밥을 한 움큼 집어 날름 입에 넣는 것이 아닌가. 안회는 가장 믿고 사랑하는 제자라서 공자는 더욱 실망했다. ‘평소에는 나를 위하고 공경하는 척하더니 제 배가 고프니까 저런 짓을 하는군. 같이 굶고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공자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안회를 불러 말했다.
 
“안회야, 내가 꿈에서 조상님을 뵈었는데 아무래도 이 밥으로 조상님께 제사를 올려야겠다. 제사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깨끗한 밥을 올려야 하는 법이니 어서 준비해라.”
 
이 말을 들은 안회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밥으로는 아니 되옵니다. 스승님께 드리려고 마을에서 쌀을 얻어다 밥을 지었는데 솥뚜껑을 여는 순간 천장에서 그을음이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그냥 드릴 수도 없고 버리기도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만 조금 떠먹었습니다. 이 밥은 스승님께서 그냥 드시고, 제가 다시 쌀을 구해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안회를 의심했던 자신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다.”
 
정갈한 음식으로 차려야 하는 제사를 빗대어 스승보다 먼저 숟가락을 댄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던 공자는 오히려 믿는 사람을 의심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공자가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한 번도 어긋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실수하고 오해하였던 점을 솔직히 시인하고 반성했던 까닭이리라.
 
이어서 마하트마 간디MahatmaGandhi(1869-1948)의 일화도 좀 소개해보리라.
 
Episode 1
 
간디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자신에게 굽신거리며 고개를 절대로 숙이지 않는 식민지 출신 젊은 학생을 아니꼽게 여기던 피터스라는 교수가 있었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피터스 교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보게, 자네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 식사하는 법이란 없다네.”
 
이에 간디는 말했다.
 
“아, 걱정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갈게요.”
 
Episode 2
 
분노와 복수심에서 피터스 교수는 다음번 시험에서 간디에게 ‘엿’을 먹이려 했으나 간디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피터스 교수는 분을 삭이며 간디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길을 걷다가 두 개의 자루를 발견한다.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차 있다. 둘 중 하나만 차지할 수 있다면 자네는 어떤 자루를 택하겠는가?”
 
“그야 당연히 돈자루죠.”

“쯧쯧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

“각자 자신이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Episode 3
 
히스테리에 빠진 피터스 교수는 간디의 답안지에 신경질적으로 ‘멍청이idiot’라 적은 후 간디에게 돌려준다. 채점지를 받은 간디가 피터스 교수에게 말한다.
 
“교수님, 제 시험답안지에 점수는 안 적혀 있고, 교수님 서명만 있네요.”
 
이 글을 보면서 내가 1970년대 잠시 런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할 때 겪은 일이 떠올랐다. 당시 법대학장으로 세계법학회 회장이다 등등 감투를 많이 쓰고 있던 모 교수님의 강의 때마다 그리고 그의 학기 말 시험문제 답안 논문으로 번번이 그의 법이론에 내가 주제넘고 시건방지게 반론을 제기하자 이 교수님께서는 견디다 못하셨는지 내게 학점을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의 시간에 내 발언을 처음부터 중단시키고 닥치라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호통을 치시기까지 했다. 이 교수님 덕택에 나는 일찌거니 법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으니까.
 
그 당시 다른 교수님 한 분이 계셨다. 이분은 전직 외교관으로 영국 노동당 정부의 각료까지 지내신 분인데 석좌교수로 몇 개 강좌를 맡고 계셨다. 나와 학장과의 충돌을 익히 알고 계셨는지 하루는 대폿집 English Public House (PUB)으로 나를 초대해 주시고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평생을 두고 예의 관찰한 바로는 그분(학장)같이 세계가 좁다고 판치고 밖으로 나대는 사람들은 거의 다 하나같이 속이 공허해서인지 본인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특히 가정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더라. 그러니 괘념치 말고 차라리 그런 사람을 동정하고 이해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부언하시기를 나처럼 이미 철학과 종교를 공부하고 섭렵涉獵한 사람의 안목을 극히 협소한 시각의 율사律士들은 감당할 수 없는 까닭에서라며. 하지만 자기는 내 깊이 있고 고차원의 명쾌한 논지論旨를 높이 평가해 언제나 내게 후한 점수를 주었노라고 하셨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전에 있었던 일이 오버랩되는 것이었다. 1955년 내가 서울대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에 들어갔을 때 당시 종교학과 주임교수 신사훈 박사님께서 한 강의 시간에 “세계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 참 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다 ‘미신迷信’이며, 기독교 신교 교파 중에서도 자신이 속한 감리교만 진짜이고, 나머지는 다 이단異端이며, 기독교인이 천 명이면 999명은 ‘가짜 신자’라는 말씀에 내가 정중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시는 것이었다. 이 주임교수님 덕분에 내가 교회는 물론 기독교까지 진작 졸업하게 되어 두고두고 이 교수님께 감사할 뿐이다.
 
그때부터 “크리스천들만 아니라면 우리 모두 크리스천들이 될 수 있었을 텐데 But for the Christians, we could all be Christians.”란 간디의 탄식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고 동조하게 되었다.
 
“가슴 깊은 신념에서 말하는 ‘아니오’는 그저 다른 이를 기쁘게 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말하는 ‘예’보다 더 낫고 위대하다. A ‘No’ uttered from the deepest conviction is better than a ‘Yes’ merely uttered to please, or worse, to avoid trouble.”는 간디의 말에 중국의 한나라 한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司馬遷(기원전 145?-기원전 86?)이 생각난다. 생각 좀 해보면 바른 소리 하다가 남성男性을 잃고 고자鼓子가 되거나 목숨을 잃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게 현명한 최선의 길이었을까 의문을 품게 된다. 미친 사람이나 미친개하고 싸우기보다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 아니었을까? 마치 물 흐르듯 뚫을 수 없는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수로 떨어지면서 흘러 흘러 바다로 가듯 말이어라.
 
아, 그래서 예부터 상선上善은 약수若水라고 물과 같다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서산대사께서 85세의 나이로 1604년에 입적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읊으셨다는 ‘해탈시解脫詩’를 우리 다 함께 음미해보리라.
 
人生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치지 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고,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 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오.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다 바람이라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오.
줄 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소.
 
내 것도 아닌데
삶도 내 것이라고 하지 마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있겠소.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없는
욕심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 펴고
인생 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시오.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 않소.
 
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 게 있소.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다만은,
잠시 대역 연기하는 것일 뿐,
 
슬픈 표정 짓는다고 하여
뭐 달라지는 게 있소.
 
기쁜 표정 짓는다고 하여
모든 게 기쁜 것만은 아니요.
 
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소.
 
그냥 그렇게 사는 겁니다
 
아울러 오늘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준 글 ‘관 속에 누웠을 때’도 우리 나눠 보리라.
 
관 속에 누웠을 때
-중앙일보 백성호 차장
 
棺속에 들어가 본 적 있으세요?
죽어서 들어가는 관 말입니다.
저는 관 안에 누워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 체험 하루 피정이었습니다.
취재차 갔습니다.
사람들은 줄을 섰더군요.
관속에 들어가려고 말입니다.
기분이 참으로 묘했습니다.
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곁에 있던 그리스도상 아래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더군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확실히 다르더군요.
보고만 있자니 너무 궁금했습니다.
저도 줄을 섰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신부님이 관 뚜껑을 열었습니다.
계단을 밟고 제단 위에 올랐습니다.
관 속으로 한 발을 넣었습니다.
또 한 발을 넣었죠.
그리고 위를 보고 누웠습니다.
뒤통수가 바닥에 닿았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이 스르르 닫히더군요.
틈새로 빛이 조금 들어왔습니다.
그 위로 천이 덮였습니다.

관 속은 이제 완전히 캄캄해졌습니다.
눈을 떠도 어둠,
눈을 감아도 어둠.
이런 게 무덤 속이구나 싶더군요.
바깥세상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직장도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내가 아끼는 모든 물건이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때 실감이 났습니다.
뒤통수를 쾅! 치더군요.
‘아, 이런 거구나. 죽는다는 게.
바깥세상의 어떤 것도
이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구나.’
관 속에 누운 저를 다시 봤습니다.
몸뚱이만 있더군요.
‘숨을 거두었으니 이 몸도 곧 썩겠구나.’
그럼 무엇이 남나?
‘아, 그렇구나! 마음만 남는구나.
그게 영혼이겠구나.’
한참 지났습니다.
관 뚜껑이 열렸죠.
눈이 부시더군요.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주 짧은 체험이었죠.
그래도 여운은 길더군요.
‘잘 살아야겠구나.
그래야 죽어서도 잘 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며칠 전에 이해인 수녀를 만났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트위터 메시지를
묵상하며 썼던 글을 책으로 냈더군요.
책장을 넘기는데 교황의 기도가 눈에 띕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주여, 당신의 자비를 허락하시어,
저희가 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용서는 참 쉽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교황조차 이런 기도를 올렸으니 말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묵상을 통해 이런 댓글을 붙였습니다.
 
“저는 용서가 어려울 땐 미리 저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상상 속의 관’ 안에 들어가 보기도 합니다.”
 
저는 속으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수녀님은

“‘내일은 내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라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의외로 용서가 잘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삶의 열쇠가 죽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우리가 틀어쥐고 있는 모든 걸
놓아버리게 하는 거대한 포맷의 자리니까요.
 
그러니 죽음의 문턱까지 갔거나,
명상이나 묵상을 통해 죽음을 깊이 사색한
이들은 포맷한 자리를 체험합니다.
 
예수에게는 그게 십자가였고,
붓다에게는 보리수 아래 無我의 자리였겠죠.
 
시인이기도 한 고진하 목사는 그런 삶을
“덤으로 사는 삶”이라 표현하더군요.
덤으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말입니다.
 
죽었다, 다시 사는 삶.
어쩌면 그게 ‘부활’이 아닐까요.
 
모두에 감사하고,
모두를 용서하는 삶.
그게 덤으로 살 때의 선물이라면 참 괜찮지 않나요.
 
살아서 내 발로 관 속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런 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먼저
‘옳다고 여기는 나의 고집’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가 됩니다.
나의 고집이 무너질 때 내가 한 번 죽는 겁니다.
그게 진짜 관입니다.
 
들어갈 때는 힘들어도 나올 때는 홀가분합니다.
덤으로 사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종교를 떠나 죽음의 체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하고 돌봐줄 수 없잖아요.
 
내 몸 성하고 건강할 때
많이 사랑하고 위해주고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 하고 싶은 일을
뜻대로 거침없이 멋지게 이루시지요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2.12.10 10:37 수정 2022.12.10 10:45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