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평소 연락이 없던 대학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아주 친한 사이처럼 얘기하지만 나는 좋게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전화는 언제나 부탁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이 생기겠다 싶으면 일 년 내내 나의 생각만 한 것인 양 그 순간부터 인간관계를 시작한다. 느닷없이 돈을 좀 빌려달라든지 아니면 외국의 거래처에서 온 영어로 되어 있는 업무 내용을 모르겠으니 번역을 부탁하는 일도 잦다.
몇 년 전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을 때 고생했던 일이 있어 그 이후로 돈 거래는 일체없고, 후배의 일본 거래처에 문제가 생겨 그가 통사정을 하기에 무려 1시간에 걸쳐 사정을 통역해 준 뒤로 연락이 없었다. 해가 바뀌어도 명절 때가 되어도 안부 전화 한 통 없다. 나의 집과 가까이에 살아도 퇴근길에 소주라도 한잔하자는 제의는 아예 없다.
명심보감은 은혜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시은물구보?施恩勿求報
?은혜를 베풀었으면 보답을 바라지 말라
이 말을 새겨 보면 나는 후배에게 분명 잘못 하고 있는 것이다. 베풀었으면 잊어버려야 하는 것을 내가 수양되지 못한 탓으로 나의 마음만 혼란스러웠다.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기계공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으로부터 어느 날 다급한 연락이 왔다. 어느 업체에서 가공을 맡겼는데 설명서가 영어로 되어 있어 어쩔 바를 모르겠단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을 소개받아 설명을 들었는데도 번역을 해 준 사람이 기계 관련 일을 모르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3시간이 걸렸고 상당한 금액까지 주었는데 하고 아쉬워했다. 고민 끝에 엔지니어인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부탁을 받고 내가 해석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었는데 마침 나의 전공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어 약 30분 만에 끝낸 것은 다행이었다. 그날은 운이 좋았다.
며칠이 지났다. 그가‘오늘 저녁에 시간 있습니까?’하고 내게 물어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얼마 전에 도와준 덕분에 일을 마쳤고 돈도 두둑이 받았으니 술을 한 잔 사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순간 나는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그를 만나지 않고 다음 날 공장으로 갈 테니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괜히 저녁에 넉넉한 시간으로 만나면 그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술자리가 마련될 것 같아 사양을 하고 약속을 다음으로 미뤘던 것이다.
다음 날 점심때 국수를 시켜 그 공장에서 먹었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마음이 얼마나 편안하던지. 2,500원짜리 국수 한 그릇이 이렇게 맛있다니. 평소 국수를 좋아하지 않던 내가 기름 냄새나는 공장에서 맛있게 얻어먹은 이후로 두세 번 정도 더 먹었다.
사람이 살면서 신세를 질 수도 있을 터이고 그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답을 바라는 나 자신을 나무랄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연말이 가까워져 온다. 올 한 해도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많다. 그분들께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려면 지금부터 나의 메모장에 정리해 두어야겠다.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보답을 바라고 있지 않겠지만 은혜를 입은 나는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