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에 ㅅ시에 내려가 살고 있는 옛 제자가 만나고 싶다고 문자가 왔다. 나는 코로나 고위험군이라 극도로 조심한다. 안심할 수 있는 중앙공원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한 시간에 나갔는데, 아직 전철 안이라고 10분쯤 늦는다고 문자가 왔다.
불쾌한 마음으로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문자를 보내고 나니, 짓궂은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가 왔다. 공원에 이제 막 도착한단다. “아, 그럼 거기가 공원 남동쪽 끝이죠? 거기서 공원 중앙을 향해 100미터 앞으로 걸어오셔요.”
이렇게 말하고 나면, 공간 지각력이 뛰어난 사람은 쉽게 찾아온다. 위에서 보기 때문이다. 한참 후 전화가 왔다. ‘역시! 공간 지각력이 떨어지는군!’ 소나무 숲에 있단다. 공간 지각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주변의 사물에서 기준을 찾으려 한다.
다시 말해 주었다. “ㅁ아파트 1203동 보이세요?” “네, 보여요.” “그러면 그 아파트 앞에서 시청 방향으로 50 미터 앞으로 걸어오셔요.”
‘이제 찾아올까?’ 그런데 잠시 후 전화가 왔다. ㅅ대학병원 앞이란다. ‘헉! 심하군.’ “그러면 ㅁ 아파트 1203동 앞에 서계세요. 내가 손 흔드는 게 보일 거예요.”
잠시 후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그녀는 헉헉대며 캐리어를 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이유부터 다그쳤다. 약속한 시간에 오려고 했는데, 배가 고파 식당에 갔더니 밥이 늦게 나왔단다. 나는 다 예상할 수 있는 것 아니었느냐고 말하면서 불쾌하다고 말을 했다. 그녀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되고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 잘하셔요? 공간 지각력이 약해 길은 잘 못 찾을 테고요.” 그녀는 시를 쓰다가 포기하고 산문을 쓴단다. 그림책을 낼 예정이라고 했다. 글을 보니 괜찮은 그림책이 될 듯했다.
우리는 인간의 재능의 다양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은 서로 참 다르다.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무리지어 살아가려면, 역할이 분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들의 성격과 재능이 다양하게 분포하게 되었단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성격과 재능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좋아지고 사회도 좋아진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성격과 재능을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해보다 보면, 지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자신의 적성과 재능이 맞지 않는 길이다. 10년을 지치지 않고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 소명일 것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가게 되면, 잘난 사람들을 질시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모래알 하나가 되어버린다. 모래알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다른 사람들과 무리 짓고 싶어 한다. 약자인 그는 강자를 추앙하게 된다.
수많은 ‘히틀러들’이 그렇게 탄생한다. 선거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찍을 사람이 없어!”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도 사랑스럽게 볼 수가 없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게 된다. 그는 한 세계의 주인이라 당당하다. 그는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기에,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남들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것은 남들의 도움을 받는다. 사람들과의 연대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민주시민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건강하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허약하다. 돈이 유일신으로 군림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가기가 힘들다. 올해도 최고의 수능득점자들은 의대나 경영대를 선호한단다. 그들 중 얼마나 그 분야에 적성이 맞고 재능이 있을까? 자신의 길을 가지 않는 지도자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얼마나 위험한가!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다들 겨울의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가는 느낌일 것이다.
약속 시간이 늦은 제자와 두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둑해졌다. 그녀와 헤어지며 충만함을 느꼈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좋은 향을 내뿜는다. 그들과 만나면 내 안에서도 좋은 향이 뿜어져 나온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