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청양 칠갑산 애틋한 산 그림자는 천장호에 내리고

여계봉 선임기자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청양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칠갑산은 안다. 30여 년 전 주병선이 발표한 ′칠갑산′ 노래 덕분이다. 그래서인지 칠갑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베적삼 걸친 아낙네가 쭈그려 앉아 콩밭을 매는 모습의 조형물이 곳곳에 있다.

 

대중가요 노랫말로 우리에게 친숙한 칠갑산은 충남 청양군 대치면과 정산면 대치리에 걸쳐 있고 산자락이 백제의 옛 도읍지인 공주의 서쪽, 부여의 북쪽과 맞닿아 있다. 평범한 산세이지만 산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지세가 복잡하고 울창한 숲과 빼어난 비경을 간직한 계곡들이 있어 충남의 알프스로도 불린다. 

 

칠갑산은 작은 바위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육산이다. 험한 길 부드러운 길, 코스마다 색깔이 다르다. 정상을 향하는 4개의 등산로 중 어떤 산행 코스를 선택하든지 간에 2~3시간 이내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오늘은 칠갑광장에서 출발하여 평탄한 산장로(3km)를 통해 정상에 오른 후 천장로(4km)로 길을 잡아 천장호 출렁다리로 하산하기로 한다.

 

칠갑산의 명물 천장호와 출렁다리

 

산 들머리인 칠갑광장 바로 옆에는 조선말 대학자이며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한 면암(面巖) 최익현 선생의 동상이 있다. 청양군 목면에 있는 모덕사는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키고, 유배지인 대마도에서 끝내 단식으로 순절한 애국지사인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곳에는 면암의 위패를 모신 모덕사, 영정을 봉안한 영당, 그의 고택이었던 중화당, 가족 위패를 모신 영묘재와 전시관 등이 함께 있다. 

 

칠갑광장 안쪽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

 

칠갑광장에서 천문대를 지나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산책하듯 편안한 길이다. 유순한 산길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콩밭 매는 아낙네′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빈한한 농촌으로 시집간 딸이 고향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콩밭 매는 모습이 눈물겹다. 편안한 산길을 걷는데도 나그네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칠갑산 산장길은 우리네 아낙네들의 한(恨) 많은 인생을 반추하는 '어머니길'이다. 

 

산길 중간에 만나는 자비정은 백제 무왕이 쌓은 자비성에서 이름을 땄다는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성터는 찾을 길이 없으니 잠시 정자에 들러 쉬어가기로 한다. 칠갑산의 명칭에 대한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산정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일곱 군데로 뻗어 있고, 금강의 상류인 지천천(之川川)과 잉화천(仍火川)을 보고 일곱 군데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해 칠갑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정자도 산 이름에 걸맞게 팔각이 아닌 칠각으로 지었다.

 

자비정은 칠각으로 만든 ′칠각정′이다. 

 

평탄한 길 끝에 만나는 가파른 수직계단을 올라서면 정상이다. 칠갑산 정상의 풍경은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상쾌하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 자연 그대로의 울창한 숲이 펼쳐진다. 확 트인 시야는 남서쪽을 휘돌아 나가는 금강이 아련하고 동남쪽은 계룡산, 서북쪽으로는 보령 오서산이 보인다. 맑은 날에는 서해까지 보일 정도다. 

 

칠갑산 정상(561m). 주변 산들이 모두 발아래에 엎드려 있다.

 

백제는 칠갑산을 신성시해왔다. 백제는 칠갑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여기며 이곳에서 제천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 뒤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불러들여 왕위를 잇게 하고 험준한 주류성을 임시 왕도로 삼아 나·당 연합군에 항전을 계속하는데, 깊은 산세를 지닌 칠갑산 두솔성에서 나·당 연합군과 36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지만 결국 패퇴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한(恨)만 남긴 채 종말을 고한다.

 

99개의 골짜기를 지닌 칠갑산의 수해(樹海)는 가히 장관이다.

 

정상에서 천장호로 내려서는 칠갑로 숲길은 빽빽이 우거진 소나무 숲이다. 아기자기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산협 사이를 맵시 있게 휘어지며 돌아나가는 천장호에 내린 산 그림자가 속살같이 애틋하다.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를 내려서면 천장호 둘레길과 출렁다리로 이어진다. 

 

청양군 칠갑산 동쪽 천장호수에 설치된 칠갑산 천장호 출렁다리는 2009년 7월 개통했다. 다리의 길이는 207m, 폭은 1.5m이며 높이는 16m로 상하좌우로 30cm 정도 출렁이며 은근한 전율을 선사한다. 한때 국내 최장을 자랑하며 전국에 출렁다리 열풍을 불러일으킨 다리이기도 하다.

 

충남 청양(靑陽)은 푸를 청(靑)에 볕 양(陽)자를 쓴다. 푸르면서도 볕이 잘 든다. 그래서 고추와 구기자 농사가 잘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출렁다리 중간 부분에 청양의 특산물 구기자와 고추를 형상화한 높이 16m의 주탑이 시선을 끈다.

 

청양군 마스코트인 ′고추도령′과 ′구기낭자′ 

 

칠갑산 서쪽 기슭에 깃든 천년고찰 장곡사(長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다. 신라 문성왕 시절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이 창건했는데 국보가 2점, 보물이 4점이나 있는 문화재가 많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장곡사 운학루. 사찰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문루다.

 

장곡사는 경사지를 닦아 위아래에 절터를 만들었는데, 계단 하나에 번뇌 하나, 계단 하나에 망상 하나 내려놓고 오르면 아래에 하대웅전, 위에 상대웅전을 마주한다. 장곡사는 우리나라에서 대웅전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두 대웅전 모두 약사여래를 주존으로 모시고 있는데 본사인 마곡사를 바라보고 있는 상대웅전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국보 제58호 철조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상대웅전 법당에 들어 약사여래불에게 3배를 올린다. 차가운 전돌 바닥에 무릎이 닿으니 정신이 벌떡 든다.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릴 때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만 공양을 올리라는 가르침이다. 자칫 정신 놓고 기도했다가는 무릎이 남아나지 않으니 바짝 긴장해야 한다.

 

장곡사 상대웅전. 법당 바닥에는 나무 대신 차가운 전돌이 깔려있다. 

 

장곡사는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약사여래 기도 도량이다. 두 개의 대웅전 중 상대웅전은 치열하게 정진하여 윤회의 고리를 끊고 자유로워지라는 의미이고, 하대웅전은 사바를 뜻하며 중생과 보다 가까이에 있으려는 약사여래를 상징한다고 한다. 상대웅전 앞뜰에 서서 내려다보는 절간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느티나무와 기와담장이 어우러진 상대웅전 앞뜰 

 

상대웅전 앞뜰에 무소의 뿔처럼 우뚝 솟은 느티나무 거목이 마치 중생의 번뇌를 어루만져 주고 있는 듯하다. 잠시 느티나무 아래 긴 의자에 걸터앉는다. 백제의 한과 콩밭 매는 아낙네의 한을 가슴에 담고 느티나무를 한 번 쓰다듬는다. 그 긴 세월 동안 비탈진 벼랑에서 뿌리내려 흙 움켜쥐고 버텨오면서 뿔처럼 솟아 숱한 세월 못난 중생들의 번뇌를 녹여 내린 이 고목이 법당 안에 계신 약사여래의 현신이 아닐까. 

 

칠갑산에서 발원한 물은 장곡사를 지나면서 한(恨)을 녹여내고 작천리와 지천리를 돌고 돌아 금강천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든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yeogb@naver.com

 

작성 2022.12.22 11:16 수정 2022.12.2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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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