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우주의 운행 기운이 양으로 바뀐다는 사실상의 새해 첫날인 동지다. 동짓날에는 액운을 쫓고 길운을 부르기 위해 팥죽을 끓여 먹는 전통이 있다.
악귀는 붉은색을 두려워한다고 하여 붉은 팥죽을 먹기도 하지만, 집 안 구석구석에 뿌려 악귀를 물리치는 풍속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동짓달과 관련한 재미있는 속담들도 있다. 워낙 밤이 긴 달이라 "오뉴월 긴긴 해 점심 없이 어찌 살꼬. 동지섣달 긴긴밤 영감 없이 어찌 살꼬" 이런 민요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음력 동짓달은 윤달이 없다. 그래서 돈을 빌린 사람이 "윤동짓달 초하룻날 갚겠다"라고 하면 그 돈은 떼였다고 봐야 한다. 우리 조상들의 애환과 해학이 번뜩이는 말들이다.
절에서는 동지를 큰 명절로 친다. ‘동지기도’를 하는 신도들도 있다. 티베트 밀교 금강승 불교에서는 동지를 전후하여 금강살타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는 ‘바즈라킬라야 푸자’라는 큰 의식을 치른다. 시공을 달리해도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는 동지는 희망과 긍정의 기운이 찾아드는 전환점이라고 본 것 같다. 그것이 면면한 동양의 문화적 전통으로 남았다.
오늘 동짓날 아침에 카톡이 요란하게 울린다. 하나같이 팥죽을 배달하는 메시지들이다. 말 그대로 그림의 팥죽이다. 요즘 번거롭게 팥죽을 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재래시장 죽집에 가서 한 그릇 사서 먹거나, 인스턴트 팥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팥죽의 주 소비층은 노인들이다. 젊은이들은 팥죽을 촌스럽다고 하면서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패스트푸드를 즐긴다.
팥죽은 전형적인 슬로우푸드다. 그러나 영양이 풍부한 보양식이다. 나이 수만큼 넣는 일명 '새알'은 밋밋한 맛을 보완하는 백미다. 나이 드신 어른에게 조금이라도 더 드시게 하려는 배려의 미학이 새알 속에 숨어 있다.
기나긴 겨울에 심신이 약해진 사람들이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큰 가마솥에 팥죽을 한 솥 끓여 놓고 먹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살얼음이 언 동치미 한 사발 퍼서 팥죽과 함께 먹으면 긴긴 겨울밤이 정겨웠을 것이다.
오늘 동지를 기점으로 태양은 남회귀선을 찍고 다시 북쪽으로 긴 여행을 시작한다. 지금쯤 남반구인 호주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일 것이다. 그들은 팥죽 대신 팥빙수를 먹을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를 향해 남국의 태양이 올라오는 첫날, 카톡을 통해 받은 그림의 팥죽이 아닌 우리의 전통 팥죽을 사러 전통시장 욕쟁이할매집에 가봐야겠다.
[이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