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현장에서 바라본 행주대첩의 승리 요인

사진=이선우 그림 / 행주대첩도

 

전쟁기념관에서 '임진왜란 430주년 기획전'이 2022.10. 26 ~ 2023.1. 29 열리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주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다루고 있으나, 행주대첩 등 일부 육전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이선우 작가의 행주대첩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행주산성에 목책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이 보이고, 총통과 신기전 화차, 비격진천뢰도 있다. 여인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나르는 모습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나오는 참전 승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행주대첩은 진주성 싸움,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로 꼽힌다. 1593년 2월 12일(음력) 왜군은 약 3만의 병력을 3진으로 나누어 한강 하구에 있는 행주산성을 공격해 왔다.

당시 도원수 권율 장군은 약 2,300 명의 관군과 의병, 승군을 합쳐 총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 군사로 행주산성에 이중의 목책을 치고 각종 총통, 신기전, 화차 등 최신 병기를 배치한 채 참호를 파고 일전을 기다렸다.

왜군이 공격해 오자 조선군은 북을 울리며 각종 총통과 활을 쏘고 급경사의 높은 곳에서 큰 돌을 굴려 적을 막았다. 수도하는 승려들도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승병장 처영은 행주산성 서북쪽 자성에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의 목책이 뚫리자 승병들을 이끌고 달려가 육박전을 벌여 왜적을 격퇴시켰다.

전투 중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져 위기를 맞았다. 이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충청수사 정걸 장군이 배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싣고 바다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군에게 공급해 주었다. 정걸 장군은 은퇴한 노병이었지만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조방장을 맡아 현역으로 복귀했으며 1593년에는 79세의 나이로 충청수사가 되어 노익장을 과시했다.

권율 장군을 따라 올라온 삼남지방의 의병들도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민, 관, 군 그리고 승려들과 여인들까지 합세한 총력전이었다. 왜군은 결국 조선의 결사대 앞에 무릎을 꿇고,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퇴각했다. 그날 권율 장군은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자는 오직 의(意)와 기(氣)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논하겠느냐?"

행주산성에서 벌어진 일진일퇴의 공방전에서 화살과 탄환이 바닥나자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 병사들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비록 야사이긴 하지만 여기서 행주치마가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행주산성의 현장을 자세히 답사해 보면 조선군의 승리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행주산성 서쪽 사면은 깊은 한강이라 적이 접근할 수 없는 지형이다. 적군은 동쪽이나 동남쪽 사면으로 주공을 펼칠 수밖에 없지만 여기는 아주 가파른 경사면이라 방어하기에 적절한 지형이다. 

왜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하루에 총 7차례에 걸쳐 축차 공격을 해왔으나 조선군은 주공격로에 이중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화차, 비격진천뢰 등 최신 무기를 집중 배치하여 적의 인해전술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지형을 활용한 지휘관의 탁월한 전투 지휘능력과 해상을 통해 적기에 이루어진 화살 보급, 민관군 합동군의 분기탱천한 사기가 행주대첩의 승리 요인으로 분석된다.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작성 2022.12.27 10:17 수정 2022.12.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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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