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思盲이란 생소한 필자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생각을 할 줄 모른 오늘의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한자어를 채택했다. 생각을 할 줄 모르거나 생각하기 싫어하는 참으로 인간의 특권을 포기하는 시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 것인가?
파스칼은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길을 주어 인간의 존재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인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 나오는 말이다.
지구상에 생존하는 동물 중 유일하게 생각을 하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 지구를 지배하고 살아가는 것도 다지고 보면 인간이 생각을 통해 나약한 존재를 극복하고 막강한 힘으로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힘의 산물이 바로 과학기술이며, 과학기술 의해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 편리한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의 도구를 만들어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지상과 해상, 공중을 날아서 이동도 하고, 컴퓨터를 만들어 인간들끼리 소통하고 지식을 생산해내고 활용하고 만들어낸 기계들을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게 되고 모든 것을 컴퓨터에 의존하게 된다. 모든 지식과 정보를 컴퓨터가 대신하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알고 싶고 의문 난 사항이 있으면 옛날에는 그것을 알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으나 오늘날 짧은 순간에 컴퓨터에 의존하여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세계가 한 가족이 되고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시시각각 알 수 있는 첨단 정보의 시대에 이르렀다. 따라서 중요한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 암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중세 플라톤은 신 중심의 세상을 규정하고 이원론의 시각으로 육체보다 정신이 더 선하며, 눈에 보이는 것은 악으로 보았다. 인간이 천국으로 가려면 맑은 이성과 감정을 추종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외 맥락을 같이 한 사상이 기독교 사상이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몇몇 과학자들이나 기계개발 관련자들만 생각의 힘을 키워 더 진보된 과학으로 발전시키면 되고 나머지 그 사람들에 의해 개발된 도구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대중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사소한 일까지도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었다, 컴퓨터는 오늘날 사람들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먼 거리에 떨어진 사람과의 소통도 컴퓨터 통신이나 핸드폰으로 가능하여 첨단과학기계들을 생활에 이영하면서 생각하고 정보를 기억할 필요가 없게 되자 점점 생각하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물질적인 가치를 좇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갈등하게 되면 교화나 사찰을 찾아가 죄를 빌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물며 내의 존재에 대한 깊은 사고까지고 종교기관에 의존하여 물질적인 가치를 지불하고 면죄부를 사게 되는 인가 스스로가 생각의 기능을 기계와 종교기관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메스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정보에 의해 생각을 고정화시킴으로서 점차 정신적인 사유의 기능을 축소함에 따라 장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시뮬라크라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거기에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대중들의 시뮬라시옹 하도록 유도하는 대자본가나 권력자들이 지신이 의도한 대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검은 속셈을 의식하지 못하고 대중매체가 의도한 때로 따라서하는 노예의 삶을 살면서 행복해하고 있다. 이러한 삶은 신이 인간에게 준 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가 편리함을 쫓아 노예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실존적인 삶의 가치를 스스로 찾는 길은 독서와 사색으로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생각하는 생활이다. 깨우치지 못하고 일생을 허비하여 생각이라는 빛나는 진주를 스스로가 밟고 원초적인 본능의 삶을 좇아 살아가는 돼지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헛된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원초적인 욕심 만에 기대어 가치 있는 삶을 포기하고 물질적인 가치와 높은 지위나 권력을 탐하는 어리석은 삶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당시 의사였던 그가 의술은 배워도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데 인생은 너무나 짧다는 말이다. 당신이 배부르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데 만족하고 사는 삶은 짧은 인생을 더 짧게 할 뿐이다. 성경의 전도서 1장부터 18절에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데, 인간이 쫓는 명예나 지위 등이 모두 헛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라는 지혜를 주고 있다.
날마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인간의 추악한 소식은 바로 부질없는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일어난 사건들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한번쯤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선생님은 어린이를 가르치는 보람으로 살아간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고 삶의 의미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본질적인 가치의 삶이다. 그런데 그 집단 속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경쟁에 에너지를 소모하거나 조금 더 물질적인 가치를 얻으려고 남을 짓밟게 되면 스스로가 교사라는 직분을 포기한 것이다. 이미 스승이 아니다.
스승의 길은 속물적인 가치를 우선하는 길이 아니다. 모두들 관리자로 승진하기 위해 스승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거나 물질적인 가치만을 좇아가게 되면 무리가 뒤따르게 된다. 여러분의 제자가 여러분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 학습하고 있다. 교사는 바로 제자들의 잠재적인 교육과정인 셈이다.
자신만의 명예와 물질적인 가치를 좇는 속물적인 교사가 되지 말고 아무리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어린이들의 마음에 각인되는 스승이라면 그들은 당신의 미래요 이 나라의 미래의 주인이 될 사람이다. 현재의 가치에 인정받지 못해도 미래에는 당신의 제자가 인정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생각하는 삶을 살도록 교사 스스로가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책을 많이 읽고 사색도 하고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전문직으로서의 부단한 연수를 통해 보람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오늘날 어린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 그러한 어린이들에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일은 교사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길이며, 제자들의 앞날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생활, 이웃을 돌아보며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思盲의 시대에 思盲을 깨우쳐 폭넓게 사유를 즐기는 삶으로 제자들에 思惟를 하며 살아가는 참다운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안목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김관식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