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꽃이 봄보다 먼저 왔나 보다.
섬진강은 한반도의 뭍에 봄이 상륙하는 관문이다. 봄의 화신이 백운산 자락의 동백 숲에 온기를 불어넣으면 붉은 동백은 섬진강변의 매화를 깨우고, 섬진강은 매화 향을 가득 담고 유유히 흐른다. 이윽고 매화는 산수유를 재촉하고, 산수유의 노란 영혼은 벚꽃을 부드러운 숨결로 어루만져 꽃망울이 터져 나오게 한다.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늘 이맘때만 되면 김용택 시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에 나오는 이 구절이 떠올라 가슴이 벌렁거린다.
천천히 올라오는 봄기운에 가만히 몸을 맡겨도 되지만, 홍매가 전하는 꽃향기를 맡아야만 봄인 줄 아는 성미 때문에 남도를 향해 먼 길 떠난다.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너른 들을 덮고 있던 겨울옷을 걷어내고,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 밑으로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풀들이 기지개를 켠다.
매화 축제 기간이라 밀려드는 차량들 때문에 예정보다 늦게 산 들머리 관동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갈미봉과 쫓비산에 올라 섬진강 매화마을로 내려선다.
봄을 향해 달려가는 길목에 있는 관동마을 산자락은 연두와 초록이 번지고 있다. 마을 안쪽에 쫓비산 6.5㎞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온통 매실나무가 반긴다.
초입부터 매화 향과 초록 수목들이 내뿜는 상큼함이 훅 밀려온다. 산행 시작 1시간 채 안 돼 배딩이재에 올라선다. 오른쪽 방향은 매봉을 거쳐 백운산으로 가는 등로이고, 왼쪽 쫓비산은 3.9㎞다. 재에서 갈미봉 쪽으로 10여분쯤 올랐을까. 숲을 벗어나니 한순간 하늘이 열리고 양쪽 방향이 트이는 안부가 나타난다. 오른쪽에 불쑥 솟은 2개의 암봉 억불봉과 그 옆에 뾰족한 백운산이 보인다.
하동 악양 평사리 섬진강 너머에는 백운산(1216m)이 거대한 장벽처럼 서 있다. 백두대간 호남정맥이 내장산, 무등산을 거쳐 조계산에서 동진한 뒤 이곳 백운산에서 마지막 용틀임을 한다. 그리고는 악양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무릎을 세워 쫓비산을 만든 후 섬진강에 발을 담근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면 공원 속 산책로 같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숲길이 무려 5㎞ 이상 이어진다. 나무들이 피워 낸 신록의 고운 빛이 나를 유혹하면, 나는 기꺼이 그 신록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행복한 봄을 누리리라.
갈미봉에 닿는다. 팔각정자가 서 있고 갈미봉 좌측 아래로 섬진강이 보인다.
아득한 섬진강을 보면서 갈미봉 마루금을 타고 간다. 오른쪽으로 백운산 정상이 아스라이 보이고 억불봉이 힘차게 다가선다. 바람재에 바람이 분다. 형체 없는 바람은 나뭇잎을 어루만지고, 나의 마음도 다독거린다.
쫓비산 정상이다. 동쪽으로 열린 조망을 통해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섬진강 줄기가 다가온다. 굽이치는 흐름을 따라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면 강 언저리에 300년의 숲 하동 송림이 보인다.
갈림길에서 직진 진행하면 토끼재로 간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하산하면 잠시 뒤에 매화군락과 대숲에 둘러싸인 청매실농원이 아래에 보인다. 겨우내 움츠렸던 꽃망울 터트리며 활짝 핀 홍매화 붉은 속살이 몽환적이다. 산자락과 강가에는 봄의 생명력이 가득하다.
한 구비 도는 산길에서 섬진강과 마을 풍경을 보면서 매화 밭에 들어서니 경기민요 매화타령이 절로 나온다.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디야 어허야 에 디여라 사랑도 매화로다.
백매화가 단아하고 청아하다면 홍매화는 열정적이다. 야윈 듯 가지 위에 점점이 붉은색에 흰색 물감을 조금 떨어뜨린 듯한 화사한 홍매화는 청명한 봄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겨우내 움츠렸던 꽃망울을 터트리며 활짝 핀 매화는 오늘따라 더욱 도도하다. 넉넉한 꽃잎이 그러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그러하고, 맑은 향이 그러하다.
경봉 스님은 생전에 “향기에도 소리가 있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지금 매화 향은 봄을 노래하고 있다.
투박한 돌담과 초가집 그리고 매화꽃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봄을 시샘하는 차가운 강바람이 산자락으로 달려오지만 만개한 매화꽃은 전혀 개의치 않고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농원을 일군 홍쌍리 여사는 지금의 청매실 농원을 세운 신지식인 농업인이다. 온갖 시련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를 두고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난 매화꽃에 비유하기도 한다.
매화마을을 뒤로하고 강가로 내려선다. 유려(流麗)함을 자랑하는 섬진강은 전북 진안 팔공산 옥녀봉 아래에서 발원한 물이 계곡에서 급하게 흐르거나 밭을 만나고 들을 적신 뒤 남해로 220㎞ 대장정, 마지막 느림의 미학을 풀어놓는다.
매화 떠나보내는 강가로 내려선다. 그리고 유려하게 흐르는 물빛 가득한 섬진강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봄물 오른 푸른 갈잎 서걱대는 섬진강가에 서 보았는가.
초봄 흐린 날, 청매실 마을에서 붉디붉은 매화 속살을 보았는가.
강물에 그림자 드리워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가 매화나무를 보았는가.
강가에 서서 서럽게 떠내려간 홍매화 꽃잎처럼 붉게 울어 보았는가.
이제 꽃이 지면 꽃 피던 가지에는 그리움이 물오른다.
지는 노을이 번지는 강가에 서면 서러움이 그리움 되고,
바람결에 매화 향 담은 강물은 세상 모든 그리움도 같이 담고 흐른다.
눈물에 젖지 않고, 그리움 스며있지 않고, 서러운 빛 빠진 강이라면
내 다시는 섬진강을 찾지 않으리.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