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5월 7일(양력 6월 16일) 정오 경에 거제 옥포에서 최초로 승리한 이순신함대는 물과 땔나무를 보급하기 위하여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이동했다. 이때 척후선으로부터 적선 5척이 가까운 곳에서 항행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함대는 신시(오후 4시 전후)에 출동하여 현재의 마산합포구 구산면 반도 동측으로 들어가 합포만 깊은 곳까지 추격했다. 쫓기던 적선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다 급한 나머지 배를 버리고 합포(合浦,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있는 마산왜성에 상륙하여 숲속에서 바다를 향해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순신함대는 사정거리 밖에서 적정을 살피다 기습적으로 다시 포구 안으로 쳐들어가 적선 5척을 파괴, 불태우고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구산면 반도 끝에 있는 남포(藍浦)로 내려와 정박하였으니 이것이 합포해전이다. 이순신함대는 다음날 고리량(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와 저도 사이의 해협) 일대를 수색한 후 고성 땅 적진포로 갔다.
합포해전이 있었던 마산왜성은 창원성이라고도 한다. 1592년 음력 4월 부산에 상륙한 왜장 다데(伊達政宗)가 김해성을 함락한 뒤 창원을 거쳐 마산으로 쳐들어와 용마산을 군사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그 뒤 1597년 10월 정유재란 때 왜장 나베시마(鍋島直茂)와 그의 아들이 본격적인 축성공사에 착수하여 12월에 완공하였다.
마산왜성은 합포(合浦)성지와 연관해서 연구 검토 되어야 한다. 합포성지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 73-4, 73-18 일원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지로 동국여지승람에 “합포성지는 배극렴(裵克廉)이 쌓은 우도병마절도사영(右道兵馬節度使營)의 터로 보인다. 이 영은 옛 합포현에 위치하였는데 부(府)와의 거리는 13리로, 석성의 주위는 4,291척이며, 높이는 15척이고,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다. 우왕 4년(1378)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성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426년(세종 8)에 좌우도(左右道) 병영(兵營)이 합해져 경상도 병영이 되었다가 1437년 다시 분리되었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경상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주로 우도병영을 옮긴 뒤 합포진(合浦鎭)으로 남았다. 합포해전은 이곳에서 있었다. 이순신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합포는 마산이라고 비정(比定)했다. 노산 이은상, 조성도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그리고 본인도 일관되게 마산합포구 산호동 마산왜성 터인 용마산공원 아래라고 밝혔다.
그런데 최근에 일부 이순신 연구가들이 합포는 마산합포가 아니고 진해에 있는 합포라고 주장고 있다. 그 근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장초에서 합포를 '웅천 땅 합포(熊川地 合浦)'라고 했다는 것과, 그때의 상황을 따져보면 오후 4시경 영등포에서 마산합포까지 들어가 전투를 치르고 나올 물리적 시간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우선 '웅천 땅 합포'부터 생각해보면, 합포는 창원 땅과 웅천 땅의 경계에 위치한다. 경황이 없는 전란 중이라 이순신 장군은 가끔 이런 착오를 일으킨 적이 있다. 1592년 6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에는 창원 땅과 웅천 땅의 경계에 있는 섬 '증도(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실리도)'에 대해 6월 7일에는 웅천 땅 증도라 했다가, 6월 8일에는 창원 땅 증도라고 했다.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 직후 하룻밤 묵고 간 '사천 땅 모자랑포(毛自郞浦)'를 1593년 9월 1일 일기 말미에 기록한 잡록에서는 '고성 땅 모사랑포(毛思郞浦)'라고 한 적도 있다. 모자랑포는 사천 땅이지만 고성 땅 경계와 가까운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포의 경우에도 창원 땅이지만 '웅천 땅 합포'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두번째, 상황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부분에 대해서 따져보자. 양력 6월 16일은 하지를 엿새 앞둔 시점이다. 이날 이 해역의 일몰시간은 19시 50분이다. 보통 해가 지고 나서도 약 30분 정도는 어두워지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이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남포로 왔다는 것은 21시 이후로 추정된다. 그날 밤은 음력 7일이라 날씨가 맑았다면 초저녁부터 반달이 떠서 밝게 비추었을 것이다.
거제도 영등포에서 마산합포까지의 거리는 약 21km이다. 판옥선이 시속 약 7-8km 정도로 달린다고 가정하면 3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여름날 낮에는 일반적으로 해풍인 남풍이 부는데 순풍에 돛을 달았다면 이보다 더 빨리 도착했을 수도 있다. 오후 4시에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추격했다면 저녁 7시면 마산합포에 충분히 도착했을 것이다.
왜군은 이미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산호동 숲속으로 들어가 버린 상황이라 배 5척을 불태워 없애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고 본다. 어두워지기 전에 전투가 끝났다는 말이다. 전투가 종료된 후 저녁 8시경 마산합포를 출발하여 남포까지 내려오면서 밤중에 노를 재촉했다고 하니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마산합포에서 남포까지의 거리는 약 15km이므로 2시간 정도 걸려 밤 10시 전후에 남포에 도착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진해 합포에서 해전이 있었다면 밤중에 노를 저을 일이 없다. 거제 영등포에서 진해 합포까지의 거리는 약 8km이고, 거기서 남포까지의 거리는 약 9km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영등포에서 오후 4시에 출발한 이순신 함대가 전투를 치르고 남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두워지기 전에 남포에 도착했다고 봐야 한다. 밤중에 노를 저을 이유가 없다.
고지도는 엄청난 정보를 담고 있다. 지명은 물론 인근의 산맥, 강, 마을 등 자연지리 정보와 향교, 창고, 봉수대, 길 등의 인문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밀지도인 동여도에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진해구 사이의 지리 정보를 충분하게 담고 있다. 마산합포구에는 '합포(合浦)'와 '마산포(馬山浦)'가 병기되어 있고, 월영대, 두척산(무학산) 반룡산(팔용산) 등이 나온다.
그러나 소위 진해 합포라고 주장하는 곳 근처에는 어디에도 합포라는 지명이 없다.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일대는 '풍덕포(豊德浦)라고 했고, 진해 합포라고 주장하는 진해구 원포동 학개 마을은 '원포(芫浦)'라고 명시되어 있다. 주변에 안민령(安民嶺, 안민고개), 장복산(長福山) 하서(下西) 등이 있지만 합포(合浦)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진해 합개(合浦)라고 주장하는 곳은 엄격히 말하면 진해 학개(鶴浦)가 맞다. 2003년 7월 진해시에서 발행한 행정지도에는 분명히 '학개(鶴浦)'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鶴浦) 마을'을 '합개(合浦) 마을'이라고 동네 이름을 의도적으로 바꾼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2018년 현재 네이버 지도는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미 학개를 '합계마을'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다음 지도에서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지도가 뜬다. 그나마 다행이다.
일부 이순신 연구가들이 담합하여 합포를 창원시 진해구 명동 학개 마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로 이순신 장군과 역사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부 인터넷 카페가 조장하고 있으며, 지역 이기주의와 결탁한 파렴치한 사기극이라고 봐야 한다.
해전지명을 비정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정인이 어떤 주장을 했다고 역사적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향토사학자들과 관련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학술대회 등을 개최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2014년 경남 고성군에서 개최한 '적진포해전지' 비정을 위한 학술대회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특정인의 주장만 믿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거나 기념공원 등을 조성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할 수 있으므로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은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지역이기주의에 볼모로 잡혀서는 안된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 서울이순신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