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형 칼럼] 반백(半白)들의 초등동창회

하진형

 

조금은 낯선 곳에서 반백(半白)의 친구들과 밤을 지새운 두 남자가 이른 아침에 걷는다. 두툼한 외투의 깃을 세우고 밤사이에 길바닥에 눌러 앉은 서리를 밟는다. ‘스걱, 사각~’ 소리가 앞서간다. 어젯밤의 과음이 깨고 있듯 작은 선창가엔 더 작은 배들이 긴밤에서 깨어나고 있다. 빨갛고 하얀 등대도 친구사이인지 나란히 솟을대문처럼 서서 오가는 이들을 지킨다. 지나가던 바람을 하늘에 떠 있는 낮달이 내려다본다. 반백들이 어질 적 겁 없이 풍덩거리며 놀던 바다다. 고요한 바다는 어제 어떤 바람이 불어왔다가 지나갔을까.

 

반백년 전 무렵에 새로 넓힌 초등학교 운동장온 무척 넓었었다. 기억으로는 운동장을 넓히고 마무리 단계에서 울타리 대용으로 측백나무를 심기도 했다. 천황산(天皇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작은 산(그때는 아주 높게 보였었다) 아래 학구(學區) 4개 마을엔 조무래기들의 놀이 소리가 온종일 시끄러울 정도였다. 그들이 거의 50여 년 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뿔뿔이 흩어져 세파(世波) 속에서 각자가 자신들의 길을 걷다가 다시 만난 것이다, 그 와중에 학교는 분교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폐교되고 지금은 체험마을로 쓰이고 있다. 

 

거의 반세기를 보내고 또 그렇게 반백의 머리를 앞세웠으면서도 얼굴엔 어린 초등학생들의 미소 그대로 가득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바로 이런 곳인가? 예전 그 시절에 친구네 집이 있기도 했지만 마을과 조금 떨어진 탓에 무서움을 많이 타는 아이들은 가보지도 못했던 곳인데 지금은 고급리조트가 들어서서 외인(外人)들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다. 덕분(?)에 예전엔 갯펄에서 낙지와 조개를 줍던 어머니들이 그린에서 잔디를 관리하는 작업을 하신다. 계절에 관계없이 소득은 좀 올리겠지만 고향을 잃은 것 같이 기분은 씁쓸하다.

 

초등동창회랍시고 이곳저곳에서 돌아가며 모여 시시덕거리며 정을 나누다가 불청객 코로나로 그것마저도 못하고 3년 만에 만났는데 경향(京鄕)각지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모인 곳은 폐교된 모교(母校)가 보이는 리조트였다. 그들이 모이자마자 저절로 반세기 전의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누가 어떻게 살고 있고의 문제는 끼어들 틈이 없다. 그야말로 모두들 초등학생이 되어 그 시절 추억을 끌어올린다. 이미 중년을 넘긴 친구들은 남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삶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났지만 모교(母校)를 바라보는 눈망울엔 그리움들이 켜켜이 쌓였다. 흰머리, 반백머리, 대머리, 가발 쓴 머리는 각자의 삶처럼 달랐지만 쌓여온 그리움은 깊이는 모두가 같았다. 

 

그때 코흘리개들을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고,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삶은 고구마 한 개로 점심을 같이 때우던 친구 중 몇몇은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이미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는 ‘건강’으로 귀결되었다. 말수 적던 친구가 ‘우리 10년 뒤에도 다 볼 수 있겠지?’라고 툭 던지자 ‘그걸 말이라고 하냐?’라는가 하면 ‘잘 살아야지~’라며 조용히 거드는 친구도 있다. 그렇게 이미 그런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가수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던가를 외치고 어떤 책에는 과거는 추억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그 시절은 지금도 여전히 곁에 머물러있고 아름답다. 절로 그 시절이 소환되는 것은 그립기 때문이다. 그리움이란 것!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초등학생이던 그때 옆 동네 친구 따라 선창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지천에 깔려있던 해삼을 잡기도 했었는데 요즘 세대의 엄마들이라면 기겁을 할 일이었다. 현재는 인근 공단 조성과정에의 준설토가 매립되어 복합리조트가 만들어졌다. 시대와 세대는 숨 가쁘게 바뀌고 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과거를 몇 시간만이라도 잡고 싶다. 그렇게 초등동창회의 밤은 깊어가고 옆방 친구들은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단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이튿날 아침 서리를 밟고 걸었던 갯가의 산책길도 무척이나 편안하고 좋았다. 또 읍내 시장통 식당의 아침 식사도 고향 내음에 푹 빠졌다. 그리고는 떠나려던 아쉬움에 반백의 머리를 이고 더 걷는다. 어쩌면 인류문화가 가장 격변하는 시간의 한 가운데를 걸어 온 친구들이다. 고향에서 후학(後學)들을 가르치거나 소를 키우는 친구, 30년 넘게 시부모를 병수발을 드는 속 깊은 며느리, 작은 식당에서 낯모르는 노부부의 밥값을 몰래 치러주는 아이, 폐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주는 친구, 퇴직 후 제2의 삶을 준비하는 장년 등등 어깨에 많은 사연을 지고 걷고 있다. 

 

친구야~ 고맙다. 건강하게 나타나서 고맙고 배꼽 빠지게 웃게 해줘서 더욱 고맙다. 우린 아직 젊다. 시대가 변했다고들 하지만 말수 좀 줄이고 나이 들어서도 자기 역할을 조용히 한다면 꼰대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친구라고 모두 관포지교(管鮑之交)이거나 문경지교(刎頸之交)일 필요는 없다. 그냥 편안한 지란지교(芝蘭之交)면 더욱 좋고 아니면 그냥 몇 년 만에라도 건강하게 만나 웃고 떠들면 된다. 벌써 내년이 기다려진다. 올해 못 온 친구들도 보고 싶다. ‘친구야, 우리 모두 다 같은 마음이지?’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

작성 2023.01.20 11:09 수정 2023.01.2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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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