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중앙일보에서 독후감 공모가 있었다. 딸아이는 ‘빨간 펜’이란 글을 읽고 쓴 독후감이 초등학생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독후감들을 모은 책이 발간되어 집으로 배달되었다.
일반부 대상이 여대생이 쓴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독후감을 읽었음에도 가슴이 뜨거웠다. 그래서 남해도서관으로 가서 ‘칼의 노래’를 빌려다 읽었다. ‘칼의 노래’는 36살까지 읽은 그 어떤 책보다 강렬했고 감동이었다.
그 시절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고 난 뒤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근검절약하던 시기인지라 도서관에 반납을 하고 다시 빌려와서 ‘칼의 노래’를 몇 번을 읽었다. 그래도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남해에서 태어나 충무공 이순신의 유적지로 소풍을 가도 아무 생각도 없었던 예전과 다르게 남해 충렬사, 이락사로 나들이를 가면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42살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교육을 받고 이순신 장군을 열렬히 예찬하고 있다.
그러다 2009년 명량대첩제에 갔다가 멀리서 작가 김훈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인터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경호원이 붙어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만 용감한 서재심은 “선생님 제가 남해 이순신영상관에서 해설하고 있는 서재심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글을 읽고 제가 충무공 이순신에 반해서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 경호하는 청년이나 작가님이 참 우스웠을 것이다.
그리고 늦은 나이로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면서 졸업논문도 ‘칼의 노래’로 썼다. ‘칼의 노래 주인공과 충무공 이순신이 죽음을 보는 시각 차이’이란 주제로 썼다. 논문을 쓴 사람들이 별로 없어 참고문헌을 찾기 힘들었지만 개인적인 가치관과 사생관 그리고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첨가 된 논문이었다.
그리고 경상남도도청에서 작가 김훈의 강의가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강의실에서 강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강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오는데 작가 김훈이 들어오시길래 너무 반가워서 소리쳤다.
“선생님 해남에서 제가 이순신영상관에서 해설하고 있다고 한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김훈 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다는 소리에 나는 마음이 들떠서 강의를 듣는 내내 가슴이 설렜다. 작가 김훈이 말했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노산 이은상이 번역한 난중일기를 읽고 영·미의 시를 배우는 자신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져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에 갔고 최전방에서 보초를 서면서 언젠가 이순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생님은 다니던 신문사 기자를 그만두고 처음으로 쓴 소설이 ‘칼의 노래’라고 했다. 30년 이상 발효되고 숙성된 글이 칼의 노래인 셈이다. 그 뒤 김향숙 해설사가 남해 지족에 있을 때 ‘작가 김훈과 함께하는 남해기행’이란 플래카드를 단 버스가 지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나섰다.
‘작가 김훈과 함께하는 남해기행’ 플래카드가 붙은 버스를 찾다가 원예예술촌을 돌아보고 나오는 김훈 작가와 마주쳤고 또 점심을 먹고 ‘이순신영상관’앞에서 다시 작가 김훈을 만났다.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는 내 운명을 바꾼 소설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54살 남해에서 나라를 구하고 전사했다. 그런데 작가 김훈은 54살 칼의 노래를 발표했다고 했다. 그 소설을 읽고 나는 운명이 바뀌었다.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람과 사람이 맺은 인연이 참 경이롭다. 이 경이로운 인연들이 간혹 한 번 온 인생을 기적의 길로 인도한다.
인연! 나도 누군가의 삶에 이런 경이로운 인연의 끈으로 연결해 주는 사람이 되어 보기를 꿈꾼다.

[서재심]
시인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코스미안뉴스 객원기자
서재심 alsgml-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