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4월 13일(이하 음력)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일본과 강화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594년 3월 3일부터 5일 사이에 제2차 당항포해전이 있었다. 강화조건을 어기고 고성땅과 진해땅(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일원)으로 진출한 왜선 31척을 이순신 장군이 모두 섬멸해버린 사건이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을 봉쇄하고 거제도 북단과 증도(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시리섬) 사이에 학익진을 펼쳐 적의 퇴로를 차단한 채, 이틀 동안 어영담이 지휘하는 특수 임무부대를 시켜 읍전포, 시굿포, 어선포, 당항포 등지에서 적선 31척을 전부 소탕해버렸다.
제2차당항포해전은 천문과 지리 전략가인 이순신 장군의 '괭이바다 해상봉쇄작전'이 이루어낸 쾌거라 할 수 있다. 전투가 있었던 바다 가운데 광이도(廣耳島)라는 섬이 있어 이 일대를 지역민들은 '괭이바다'라고 부른다.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나 '광이'를 '괭이'로 발음하고 있다. 괭이바다는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끝자락과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를 잇는 경계선 서쪽 바다와 견내량 이북 지역의 바다를 말한다. 광이도 주변에는 칠천도, 가조도, 저도 등의 섬들이 산재해 있다.

한산도에 있던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을 지나 괭이바다로 진출하여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큰 승리를 거둔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로 복귀하던 중 역풍이 거세게 불어 배를 움직일 수 없어 3월 6일 흉도(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고개도)에 머물고 있었다. 이날 이순신은 명나라 도사(都指揮使司) 담종인(譚宗仁)으로부터 왜군을 치지 말라는 어이없는 내용이 담긴 패문(禁討牌文)을 전달 받았다.
웅천에 와서 왜적과 강화를 논의하고 있던 담종인이 이순신에게 패문을 보내어 왜군을 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패문의 내용을 읽어본 후 격분한 이순신은 3월 7일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라는 답서를 써서 보냈다.
“조선 신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삼가 명나라 선유도사 대인 앞에 답서를 올립니다. 왜적은 스스로 싸움을 개시하여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저들은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서울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이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뼛속에 맺혀, 이들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각 도의 배들을 정비하여 곳곳에 주둔시키고 동서에서 호응하면서, 육지에 있는 장수들과도 의논하여 수륙으로 합동 공격을 펼쳐 남아 있는 왜적들이 '단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隻櫓不返)'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습니다.
이달 3일에 선봉선 200여 척을 거느리고 바로 거제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무찔러 종자를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선 30여 척이 고성과 진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쪽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왜적들은 민가를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가고 있습니다. 또한 기와를 나르며 대나무를 베어 저들의 배에 가득 실어 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만 해도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적들의 배를 쳐부수고 놈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도원수에게 보고한 후 힘을 모아 군사를 거느리고 나서려는 이때, 도사 대인(都司 大人)의 타이르는 패문이 뜻밖에도 진중에 도착했습니다. 받들어 두번 세번 읽어보니 순순히 타이르시는 말씀이 간절하고 곡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인들은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거기는 모두 우리 땅인데(皆是我土)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입니까. 또 우리에게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고 왜적들입니다. 왜인들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들은 아직도 포악한 짓을 그만두지 않고 있습니다. 바닷가에 진을 치고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곳으로 쳐들어와 살인하고 약탈하는 것이 이전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저들이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워 잠시 시간을 두고 지켜보려고 합니다. 한편 이 사실을 우리 임금께도 아뢰려고 합니다. 대인은 이 뜻을 널리 헤아려 왜적들에게 하늘을 거스르는 도리와 하늘을 따르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서를 드립니다."
답신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순신은 당시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는 '진왜정장(陳倭情狀)'이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 때 이순신은 열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신음하면서 12일 동안 앓았다고 한다.
3월 7일 아랫사람에게 답신을 기초하게 하였으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원균이 손의갑을 시켜 작성해온 답신 역시 마땅치 않아 이순신은 위중한 몸을 일으켜 손수 글을 지었다. 이순신은 정사립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해서 담종인에게 발송한 후 이날 오후 늦게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의 이 답서 한장을 잘 읽어보면 그 분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금토패문은 담종인이 명나라 신종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순신에게 내린 일종의 명령이다. 이를 거역하게 되면 자칫 생명을 보전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 할 말은 다 했다.
비록 편지 한 통 이지만 중요한 일은 본인이 끝까지 챙기는 모습에서 정성을 다하는 이순신의 일 처리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를 지혜롭게 거절하면서 죽음까지도 각오했던 이순신의 사생관과 나라사랑이 이 한 장의 답신 속에 다 들어 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