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의 경험을 많이 쌓았음을 말함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은 아랫사람들에게는 인생의 훌륭한 스승이요 살아 움직이는 교과서일 수도 있다. 그분들의 인생 경험이나 사회적인 역할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기도 한다. 장유長幼의 질서가 깨어져 가고 있다고 개탄하는 요즈음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흔히 말하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회사의 규정 논리나 사회통념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어느 선배님은 40 여 년을 한 분야에서만 봉직하셨다. 정년을 지나서는 촉탁으로 근무하시다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일손을 놓겠다는 것이다. 간간이 선배님의 사무실에 들러 차를 얻어 마시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근무조건이 나이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나이가 많다는 얘기가 오간 듯하다. 또한 부서의 부하 직원에게도 진급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직장을 그만두는데 한몫을 했다. 누구나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한 편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나도 올해를 지나니 망칠望七이 머지않았다. 시인 두보杜甫는 그의 시‘곡강이수’曲江二首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약 1250년 전 시인의 눈에 비친 70세.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칠순이라는 나이까지 사는 노인이 아주 드물었던 모양이다.
나 어릴 적 고향마을에는 연세가 60에만 이르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되었다. 이 나이가 되면 환갑이라고 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하고 장수하고 있음을 축하해 드렸다. 그분들의 허리는 꾸부정하고 걸음걸이도 둔해 보였다. 손자들의 재롱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고 신체적으로도 건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술醫術이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육십은 많은 나이가 아니다. 나아가 칠십은 드물지도 않고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니며, 고령화 사회의 기본나이에 불과할 뿐이다.
언젠가 저녁 퇴근길에 낙엽이 날리는 주점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선배님이 말씀하시기를
“올해가 지나고 나면 나도 저 낙엽 같은 신세가 되겠구나.”
불어오는 늦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꽤 쓸쓸하셨던 모양이다. 목적지 없이 이리 저리로 나뒹굴어 가는 연약한 모습의 낙엽이 슬프게 보였을 것이다.
얼마 전, 80세가 넘은 나이에 영어동시통역사에 도전하는 할아버지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분의 꿈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명예를 위한 것은 더욱 아니라고 했다. 다만 자기 자신이 이 나이에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요즈음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참으로 교훈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다.
70대 후반의 어느 할아버지는 대입수능시험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의 동생뻘 되는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보다 더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도전이 또 있을까?
생은 다듬을수록 보석같이 빛나는 것이다. 그것이 녹아 경험이 되고 삶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지지리도 못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그동안 살아왔던 날들의 그리움이 된다.
일출日出의 아름다움이 용솟음치는 기상에 있다면 황혼에는 너그러움이 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석양으로 물러날 때 그 안에는 수많은 시간들이 녹아 있다. 일출이 없는 석양이 있을 수 없듯이 인생이 지는 것 또한 젊음을 거쳐 왔다.
현대사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으니‘인생은 60부터’라고 하던 시절을 지나‘70부터’라고 함이 옳을 것 같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그 누구도 나이를 먹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숫자를 늘려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서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