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TV 방송국에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특이한 가면과 복장으로 얼굴과 신체를 숨겨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노래를 부른다. 결국은 경연의 일종이지만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노래로만 평가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예상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발견하는 자아와 타인의 관점 차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지식의 불완전성 등에 대해 놀라움이 더 큰 것 같다.
가면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다. 두려움 앞에 심리적 방어 기제와 자기 보호를 위해서, 자신의 힘과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가면 뒤에 숨어 해방감과 자유를 누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가장행렬이나 가장무도회 같은 축제 현장이나, 탈놀이나 탈춤 같이 계층 간의 화해와 신명풀이를 위한 마당극에서도 가면을 사용하였다.
실체의 가면만이 꼭 가면은 아니다. 말과 행동, 생각과 표정이 다른 것도 일종의 가면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내’가 다르다. 나의 말과 행동에 가끔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기보다 엉뚱하게도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만 급급했다. 나의 의도와 상대방의 인식이 달랐던 만큼 내가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었거나, 나 자신이 나의 진짜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래전 로마 시대 배우들이 연극에서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여자 역할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 가면을 ‘페르소나’라 하는데 요즘은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 철학적 의미로 사용된다. 정신분석학자 구스타프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역할을 반영하고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이루어간다고 한다. 페르소나는 결국 억압된 인격이며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을 가면으로 위장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생각이 가능한 존재는 그림자 같은 이면을 숨기고 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끼 소설 <사육제>에서 남자와 여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우리는 수많은 가면을 만들어내고 또 그 속에서 숨어 산다. 그래서 가면이 어떤 때는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식 속에 또 다른 나를 표현해내는 위선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중국의 경극 배우처럼 새로운 가면으로 시시각각 바꾸어가며 현실에 부합하고 타협하기도 하고, 주위 환경에 순응하며 위장하기도 한다. 용기라는 가면을 쓰고 사랑 고백도 할 수 있지만, 불특정 다수라는 가면을 쓰고 무질서한 군중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온 것 같다. 허세고 허울이고, 체면과 치레를 핑계로 부지불식간에 쓰는 가면이었다. 순정과 의리를 가슴속에 두고 살았지만 헌신이나 희생과는 거리가 멀어 한낱 치기에 불과했다. 싫은 것은 싫다고, 안되는 것은 안 된다고 당당하지도 못하며 목숨과 밥줄 앞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속으로는 성공한 친구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마음 없는 박수와 경탄을 내지르며 아쉬운 속내를 감췄는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고 자기 모습 그대로 살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심을 다하지 못한다기보다는 남과의 사회적인 관계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찾고 자기를 냉철히 들여다볼수록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더욱 솔직해지고 소중한 삶의 가치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현대인에게는 자기를 올바르게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가면 없이 현대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도 부족하다.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가면 뒤에 숨어서 자신의 의식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면을 벗은 민낯으로 주위를 의식한 거짓 행동일까?
가면을 벗고 살기 어렵다면 차라리 선의의 가면이라면 어떨까 싶다. 자신도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만 친구를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장서는 의연한 태도, 때로는 선행을 하고도 짐짓 모르는 척 겸손해하는 착한 가면이라면 어떨까. 조실부모한 아버지는 한 생이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설움과 질곡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힘들고 외로운 삶의 과정이었지만 자식 앞에서는 조금도 힘들지 않은 척 푸념이나 한숨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항시 쓰고 산다. 마스크가 곧 가면 같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한 측면도 있다. 내 정체성을 마스크 뒤에 숨기고 사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다. 얼굴과 표정이 드러나지 않고 분위기나 감정이 실종되어버렸다. 입을 삐죽거리는지,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도 너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너도 나를 모른다. 감추고 산다는 게, 투명 인간이 된다는 게 사뭇 편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 웃고 싶으면 웃고, 화나면 화내고 살면 좋겠지만 그것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우리 현실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얼은 영혼, 굴은 통로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마치 영혼이 들락거리는 것처럼 사람의 얼굴은 마음 상태에 따라 천태만상 달라진다. 가면은‘진정한 나와는 다른 나’의 얼굴이다. 때로는 은폐 속의 자유로움을 주지만 언젠가는 벗어야 할 가짜 얼굴이다. 어쩌면 죽음 뒤에야 비로소 가면을 벗을지도 모른다. 벗었을 때 진짜 얼굴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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