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전에 불어 닥친 IMF 한파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불고 있는 세계적 경제위기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지구촌 전체를 강타하고 있다. 기업들은 앞다투어 구조조정을 하고 몸집 줄이기에 바쁘다. 중소기업들은 대출이 막혀 돈 줄이 끊기고 근로자들은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를 감원 소식에 마음을 졸이며 조마조마하고 있다.
얼마 전, 일본인 손님이 찾아왔다. 부산 해운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간혹 가는 일식집에 예약을 위해 전화를 했다. 하지만 모든 자리가 이미 예약이 되어 빈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일이고 음식값이 상당히 비싸다고 소문나 있는 집인데도 빈자리가 없다니... 예약 시간을 1시간 정도 뒤로 늦추어 바다가 보이는 자리를 하나 예약할 수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해운대에서도 가격이 꽤 비싼 고급 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도 예약 때의 말대로 빈자리가 없었다. ‘불경기’,‘글로벌금융위기’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할 수 없는 독백을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경기가 어렵다는 것은 부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다. 우리나라 최근의 경제위기를 둘러봐도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서민들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Noblesse) 오블리주(Oblige)는 프랑스어로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시대 지배층의 역사적 정통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통성 있는 세력이 그 시대 지배층일 경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줄을 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실종되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당나라의 군사 지원에서 많이 찾지만 그보다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경제위기가 찾아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마다 고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배층이었고 수렁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민들이었다. 70년대의 오일쇼크 때 전기를 아껴 쓰자고 피켓을 들고 외쳤던 사람들도, 90년대 말의 IMF때 집안의 금붙이를 들고 나와 이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목 놓아 외쳤던 사람들 모두 서민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도자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모두 피난을 갔다. 반면 떠나지 못한 대다수의 서민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상대방과 싸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었다.
정부가 경제정책을 잘 못 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우리나라만 피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풀어야 된다고 한다.
물론 나 자신은 경제전문가도 아니고 일부를 보고 전체를 말한다는 것 또한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경제위기는 언제나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다. 넉넉하게 가진 사람들은 조금씩 아껴가며 나누어 먹을 것이라도 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낄 것도 저축해 두었던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 근처에서 붕어빵 이천 원어치와 군밤 삼천 원어치를 샀다. 나 자신도 밤늦게 길가에서 장사하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민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기가 마음에 걸려 얼마간의 먹거리를 샀을 뿐이다. 내가 샀던 양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냐마는 그 비싼 일식집에서 손님이 북적대는 상황과 추위에 떨며 몇천 원어치를 파는 노점상이 오버랩 되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