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영어 제목의 첫 대중가요 <럭키서울>

1949, 유호·박시춘·현인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서 노래 제목에 영어를 사용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그 노래, 제목도 궁금하고, 노랫말(가사)을 음유할 수 있으면 더욱 흥미진진하리. 우리가요 100년(130년)의 역사는 1894년 불린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최초의 창가로 치거나, 1921년경부터 통창(統唱)된 <희망가>로부터 역사의 줄을 잇는 것이 통설이다. 이 세월 강을 흘러온 대중가요는 2020년을 전후하며, 유행의 복고(復古) 바람을 타고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다. 

 

이 바람이 흘러간 노래 리메이크 경연의 광풍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스핀 오프(spin off, 파생된) 프로그램 모니터 앞에 앉은 대중들의 감흥이, 가요역사적지성(歌謠歷史的知性)을 매몰시키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다. 이런 각성(覺性)이 대중가요 제목에 매달린 영어단어(글자)와 오선지 음표아래 수놓아진 영어 가사를 생각하게 한 것, 

 

이쯤에서 펼쳐 낸 노래가 1949년 현인 선생이 절창한 <럭키서울>이다. 2023년 기준으로 꼭 74년 전에 불린 노래인데, 마치 오늘 서울의 봄을 예찬하는 듯하다. 사회적 통념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바로 세워지는 듯한 오늘의 서울, 서울의 거리는 청춘의 거리~ 희망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 너도나도 부르자 희망의 노래 /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 SEOUL SEOUL 럭키 서울.

 

노래 제목에도 행운(幸運)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럭키(lucky)가 들어가고, 오선지 음표(音標)에 매달린 가사에도 영어 알파벳 대문자가 들어갔다. 노랫말에 매달린 타자 치는 소리가 토다토닥~ 톡톡~ 들려오는 듯하다. 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4년 351일의 어둠 터널에서 빠져나온 지 4년 차, 자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지 2년차였으니, 행운이라는 말(단어)이 절묘하다. 더군다나 6.25 전쟁 발발 1년 전의 서울 풍경이니, 그 시대의 황홀감을 흥취하시라.

 

<럭키서울>(lucky seoul), 행운의 서울이라. 역사의 갈래로 해방정국 시기(1945~1950)로 불린 그 시절, 서울에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 민족은 1876년 강화도조약(3포개항,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을 기점으로 시작된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와 핍박으로부터 1945년 8월 15일에 벗어났다. 저들의 무조건 항복에 따른 서글픈 환희, 식민지 조선총독부가 대한민국으로 독립을 한 것이었다. 이 기간이 우리나라 근대역사(近代歷史) 70년이고, 현대역사는 그날부터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는 77년 시간의 타래이다. 이른 관점이 통설이다.

 

그 후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탁(贊反託)으로 흩날리던 좌우 함성의 깃발 터널을 지나, 38선 이남 자유이념정부가 수립된 이듬해가 이 노래의 탄생 연도인 것을 보면, 제목도 노랫말도 멜로디도 그럴만하다. 꿈을 품(펼치고)고, 희망을 부추김 하는 멜로디가 그렇다. 대중가요는 다분히 시대 이념을 함의 하지만 의도된 미래를 선도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를 품은 <럭키서울>은 1949년 럭키레코드 음반 L-7705에 옥두옥의 <남원소식>과 같이 실렸다. 2절 노랫말은 당시 서울의 현장감이 더 돈다. 청춘의 거리, 건설의 노랫소리가 시민의 합창곡으로 들린다.

 

서울의 거리는 청춘의 거리 / 청춘의 거리에는 건설이 있네 / 역마차 소리도 흥겨워라 / 시민의 합창곡이 우렁차구나 / 너도 나도 부르자 건설의 노래 /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 SEOUL SEOUL 럭키 서울.

 

대중가요 탄생 모티브는 공중지음(空中之音) 수중지월(水中之月)과 같다. 허공중에 흩어지는 소리에서도 풍(諷)가락을 잡고, 물속에 잠긴 달에서도 연(戀)을 건져 올릴 수가 있음이다. 이 노래가 불린 당시 서울의 거리에는 마차와 지상전철과 버스가 엇갈리면서 통행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노랫말에 역마차(驛馬車)를 얽은 것이다. 서울에 지상 전철(도로 위 레일)은 1899년부터 1969년까지 70년간 운행되었고, 버스는 1930년을 전후하면서 운행되기 시작했다. 발걸음·가마·인력거·소달구지·마차·전차·버스로 이어져 온 이동 수단의 맥락이다. 그 노정(路程)에 영어(단어·스펠링)가 우리 노래에 매달린 것이다. <럭키서울>의 모티브는 이렇다. 하동 출신 삼포 정두수(본명 정두채, 1937~2016)의 전언이다.

 

1948년 봄, 유호는 박시춘이 설립한 럭키레코드사 문예부장을 겸했다. 이때 사장이던 박시춘은 새 음반 발매를 서두르고 있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 서울야곡, 고향만리, 낭랑 18세, 선죽교> 등이 준비된 상태, 딱 한 곡이 부족하여 박시춘은 유호에게 작사를 서두르도록 보챈다. 유호는 당시 필동에 살던 박시춘 집에서 작사에 골몰했지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술만 퍼마셨다. 그러던 어느 저녁나절 신문사 편집국에 홀로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창밖을 내다본다. 오늘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이 있는 근처, 소공동 거리다. 이때 마침 조선호텔(구, 반도호텔·철도호텔) 근처에 외국인들이 지나고 있었다. 그 순간 예술가의 머리에 영감이 떠올랐다. ‘아~ 우리 서울에도 이젠 외국인들이 찾아오는구나’이런 생각을 한다.

 

유호는 순식간에 ‘영어 서울(SEOUL)’을 떠올렸다. 환희와 활기에 찬 서울노래를 만들자. 때마침 그가 피우고 있던 담배 이름이 <럭키 스트라이크>. 이 담배는 당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담배였다. 여기서 ‘행운 럭키(lucky)’를 착상하여 <럭키서울>로 제목을 정했다. 이때 그의 등 뒤에서 같은 사무실 여직원이 타자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토닥토닥 들려왔단다. 그래서 휘갈겨 써 내려간 노랫말이 빈 종이 자락을 가득 채운다, <럭키서울>이다. 우리 대중가요 100년사에 외국어(영어) 제목 이름패를 단 노래는 이 시기가 발생기다. 이후 <슈샤인 보이>, <에레나가 된 순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샌프란시스코> 등등이 그 뒤를 따른 노래들이다.

 

우리 대중가요에 서울을 모티브로 한 가요는 얼마나 될까. 1,140여 곡이란다. 2010년 3월 23일부터 5월 23일까지 서울 청계천문화관에서 전시한 『대중가요-서울을 노래하다』에서 밝힌 자료다. 제목에 서울이 들어간 곡은 540여 곡. 지명은 명동이 544곡, 한강이 85곡, 서울역이 70곡, 남산이 40곡, 종로가 39곡, 청계천과 여의도가 24곡, 이태원이 21곡 순이란다. 가수는 나훈아와 이미자가 각각 14곡으로 가장 많이 불렀고, 무려 7백여 명이 서울노래를 불렀단다. 오기택 13곡, 설운도 12곡, 도미와 윤일로 각각 11곡, 은방울자매와 주현미가 각각 10곡으로 뒤를 이었다. 서울 노래 작사가는 반야월이 31곡, 이철수 23곡, 김병걸 18곡, 손로원과 장경수 17곡 등 순이다. 지역별로는 해방광복 이전에는 종로와 한강, 이후에는 명동·광화문·영등포·강남·신사동·영동·압구정·휘경동 등으로 무대가 바뀐다. 2023년을 기준으로 통계하면 더욱 많을테다.

 

서울의 거리는 명랑한 거리 / 명랑한 거리에는 행운이 있네 / 비둘기 날으는 지붕 위에는 / 오색 빛 무지개가 아름답구나 / 너도 나도 부르자 행운의 노래 / 다 같이 부르자 서울의 노래 / SEOUL SEOUL 럭키 서울.

 

<럭키서울>을 절창한 가수 현인의 본 이름은 현동주다. 2002년 향년 83세로 이승을 등진 현인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등록한 제1호 대중가수다. 뒤를 이은 가수는 남인수·백년설·황금심·백설희·백난아·고복수 등등 1세대 개척 가객들, 등록 순서는 구전(口傳)이다.

 

현인은 1947년 무명 가수로서 <신라의 달밤>을 불러 일약 스타가 됐다. 일본 유학 중 일본제국주의 강제징용을 피해, 1943년 상하이로 건너가서 활동(신 태양악단)을 하다가 해방광복으로 1946년 귀국한 상태, 음반으로 녹음하기 전 민낯의 생얼굴 노래, <신라의 달밤>이 우리 유행가의 앙코르 신화를 달성한 것이다. 그날 서울 시공관(현, 명동 서울예술극장)에서 9회의 앙코르(재창, 再唱)를 받은 노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박수갈채가 성악을 전공한 현인을 대중가수의 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9년 부산(구포·영도) 태생. 상하이에서 샹송과 칸초네를 부르던 그는 1946년 귀국 후, 7인조악단(고향경음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성악가로서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던 그는, 박시춘의 권유로 결국 <신라의 달밤>을 취입했다. 이 노래가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꾸게 한 방향키가 되었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비 내리는 고모령, 청포도 사랑, 전선야곡, 베사메무초, 꿈속의 사랑> 등이 그의 떨리는 목청을 타고 허공중으로 흩날렸다.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그의 동상과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있고, 경주에는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있다. 그는 사관학교(1940년대 초반, 당시 일본) 진학을 권했던 아버지의 뜻과도 다른 길, 스스로가 전공한 성악과도 다른, 대중가수의 삶을 살아냈다. 현인의 운명과 숙명은 신이 결정한 길이었다.

 

우리네 인생은 운명(運命, calling)과 숙명(宿命, mission)을 합친 신명(神命, calling by God)의 길이다. <럭키서울> 노래를 만들고 부른 유호·박시춘·현인의 인생도, 그 노래를 열창(悅唱)·애청(愛聽)하는 그대와 나의 인생도 하늘의 명령을 이행하고 있음이다. 그 고고한 우리네 사랑과 이별도 신명이다. 봄꽃을 기다리는 서울의 아침, 이태원 한국유행가연구원 작은 유리창에 무지갯빛으로 햇살이 오셨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유차영 519444@hanmail.net

 

작성 2023.02.02 10:44 수정 2023.02.0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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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