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예찬’ 덕후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부해져서 사는 일이 좀 헐거워졌지만, 그런데도 자발적 가난을 택하는 ‘웰빙’이나 ‘소확행’을 추구하는 참살이족들이 꾸준하게 늘고 있다.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인데 그 주체는 물질보다 자연에서 찾는 삶을 의미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자연’은 최고의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물질로부터 받는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아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고독이라는 정신적 빈곤이 되고 삶을 공허하게 한다.
자연이 최고의 브랜드 상품이 되는 시대다. 자연은 정신문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가장 뛰어난 최고의 아이콘이다. 영화나 노래, 드라마, 패션, 책 등과 같은 문화 상품도 자연이라는 주제로 만들면 히트상품이 된다. 세상 사는 일이 힘들고 지쳐 지겹다는 증거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면 상대적으로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인지 모른다. 개미처럼 평생 일해야 겨우 집 한 채 건질까 말까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이다. 문득 바라본 푸른 하늘이 눈이 시리게 아름답고 휴가철이나 돼야 겨우 한번 떠나는 자연의 품속이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건 자연이라는 위대함이 주는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 다 힘들다. 삶이 힘들지 않으면 삶이 아니지 않던가. 이 힘듦을 내려놓고 싶어 남자들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보며 열광한다. 자연 속으로 달아나서 세상일 다 잊고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혀 살고 싶어 한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언제든지 조건 없이 품어주고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타의든 자의든 자연이라는 매력에 빠지면 인간은 금방 무장해제 된다. 서두르지 않고 완벽해지면서 모든 것을 완성하며 진정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자연을 갈망하는지 모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라는 나옹선사의 시 첫 구절만 들어도 온몸이 짜릿하다. 그 짜릿함은 이내 희열로 바뀌어 청산이 금방 내 앞에 뚝 떨어질 것만 같다. 젊었을 때 이 시를 접하면 아! 하는 탄성이 뿜어져 나온다. 정말 잘 지은 시라며 감탄하지만, 그 감탄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젊을 땐 청산보다 더 재밌고 즐거운 일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달라진다. 슬금슬금 삶이 두려워지고 뭔지 모를 덧없음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 ‘청산’을 읽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나를 위해 칠백 년 전 나옹선사가 저 시를 지었다고 생각하며 탄식하게 된다. 부질없고 덧없는 세상살이에 지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하며 마치 내 노래인 양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게 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칠백 년 전 청산 아닌 곳이 어디 있었을까 마는 그 시절에도 청산을 찾아야 할 만큼 인생사는 고통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살아야 했나 보다. 고려 공민왕의 스승이었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왕사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옹선사였지만 그의 인생은 출발부터 깨진 쪽박처럼 비참했다. 죽도록 가난한 집에서 세금을 못 낸 만삭의 어머니가 관가에 끌려가다가 길에서 나옹선사를 낳았다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생사를 넘나든 셈이다. 스무 살 무렵에는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죽고 연이어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프고 슬픈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왜 죽는 걸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하는 의문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는 결국 인생의 문제를 ‘청산’에서 풀었을 것이다. 나옹선사는 중국의 ‘선’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어쓴 사람이다. 요즘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뭣고’하며 관념에 빠진 선승들에 비하면 ‘청산’은 얼마나 유쾌하고 단순하고 아름다운 깨달음이던가. 청산은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나르시시즘이라는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연계의 일환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각성의 문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청산’을 노래 부르고 또 누군가는 ‘청산’으로 가서 살고 있을 것이다. 욕망을 욕망하는 자기 자신에게 지쳐 코로나 같은 재앙 뒤에 숨었던 사람들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며 뜨거운 자연예찬의 덕후가 될지 모른다. 종교가 낳은 이단아가 사상이라면 사상이 낳은 이단아는 사랑이 되어야 마땅하다. 나옹선사의 ‘청산’처럼 말이다. 물을 찾아 바다를 떠나는 물고기의 우스꽝스러움이 바로 나 자신은 아닌지 뒤돌아본다. 나옹선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청산은 어디인가.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