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문우(文友)들과의 답사 중에 여행목적과 어울리지 않게 콤비를 입고 왔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편한 복장으로 오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일상생활 중에 늘 입던 것을 입었는데 동행인들에게는 조금은 뜨악하게 보였는가 보다. 하긴 모두들 등산복에 배낭까지 메고 왔는데 혼자만 콤비를 입었으니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그나마 편한 운동화라도 신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옷이란 무엇일까? 모든 사물은 고유의 옷을 입고 있다. 인간에게 옷은 어떤 의미일까? 다른 존재와 달리 사람은 문명의 역사가 발전하면서 알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상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입기 시작한 옷은 추위를 막아주고 부수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게도 하고, 때로는 유니폼으로 단체의 특성이나 소속감을 나타내는 등으로 발전되어 왔다. 문제는 고유의 목적과 주객이 전도된 가치라는 것이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면을 채운 뒤에 입는 옷이라야 한다. 물론 나의 육신(肉身)도 영혼의 옷이다.
언젠가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强小企業 경영)와 거의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의 소매가 헤어져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적어도 나의 생각에는 그가 대부분의 면에서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깔끔한 나의 소매를 보면서 나는 껍질만 말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었다. 옷은 말 그대로 옷일 뿐인데 내가 그것을 입고 호가호위하지는 않았는가, 옷 주인은 따로 있는데 옷걸이에 불과한 내가 옷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언젠가부터 옷은 그 사람(주인)을 감싸는, 또는 단점을 감추는 작용이 더 큰 가치로 나타나고 있다. 즉, 동물들에 비해 털이 작아서 추위를 막는 구실에서 벗어나 그의 약한 것을 감추는 역할에 더욱 큰 방패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옷에서부터 시작한 자기 감춤과 과시욕은 그의 본질(本性)을 덧칠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드러나고 만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역설인지도 모른다. 옷은 그 상황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편하게 입으면 된다.
눈뜨면 저절로 보이는 것에 연연하다 보니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은 등한시되고 그것은 값비싼 옷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동차에 집까지 그 폭을 넓혀 급기야는 인간의 숭고한 가치를 하락시키고 있다. 천민자본주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꼴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진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에 억지로 매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나온 역사를 곱씹어보면 우리 이후 세대의 거울을 볼 수 있다.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내가 입고 있는 옷만큼 내면의 마당도 열심히 빗질하고 있을까? 옷장을 열고 보니 가득하다. 어차피, 절대로 두 벌을 한 번에 입을 수는 없다. 저 옷 중에서 나는 어떤 옷을 몇 번씩이나 입었을까? 친소(親疎)에 따라 어떤 것은 매일 입기도 하지만 어떤 옷을 비싸게 사고도 몇 번 입어보고는 여러 계절이 지나가도 그대로 걸려있는 것도 있다. 나는 어디에 쓰이고 또 몇 차례나 쓰였을까?
작은 소망이지만 나의 옷에서는 사람 냄새가 배어났으면 좋겠다. 모름지기 사람이니 사람 냄새가 먼저여야 하지만 나의 부덕으로 세상에 겸손하지 못하고 깝죽거리는 모습으로 비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실로 두렵다. 나에겐 돌아가신 어머니가 손수 하신 길쌈으로 지어주신 수의(壽衣)가 있다. 가끔 호주머니 없는 수의를 꺼내 볼 때마다 두 손에 가득 움켜쥐려는 과욕을 느끼며 흠칫 놀란다.
멀리 가셨지만 늘 가슴속에 계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얘야, 인생은 경주가 아니란다. 그냥 바르게만 살아라. 괜히 까불면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가도 오래 걷다 보면 다 젖는 것처럼 자신을 해친단다. 그러니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작더라도 네 하고픈 일 하면서 살거라. 세상 웃으면서 살다 보면 별거 없단다.’
며칠 사이에 기록적인 한파로 세상이 모두 얼어붙었다. 산 아래 작은 집에도 추위는 기어들어 와 이불을 누른다. 밤이 깊어 가는가 했는데 저만큼에서 ‘꼬끼오~’ 하고 오리털옷도 없이 평상복 차림의 수탉이 새벽을 깨운다. 뒷산 소나무는 몇 년째 같은 옷을 입고도 춥다는 말 한마디 없이 늠름하게 겨울을 나고 있다. 이래도 사람 중심의 생각만으로 본질적 섭리를 멀리할 것인가?
일찍이 노자(老子)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은 공(功)이 없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는 오래 가지 못하며 이는 모두 발끝으로 오래 서 있으려는 것과 같다’고 설파했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