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팔천오백 년 전 인간 ‘바시’다. 여섯 개의 지류가 인더스강으로 몰려드는 광대하고 비옥한 땅에 산다.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은 풍요롭고 평화로워 사람들은 다툼 없어 살고 가축들은 포동포동 살이 오른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제사장이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돕는 위대한 존재다. 고백하건대 나는 하늘의 일을 대리하는 존재지만 신적 존재나 다름없는 인간이다. 나는 그런 존재로 떠받침을 받고 있다. 아버지도 제사장이었고 아버지의 아버지도 제사장이었다. 이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정해준 위대한 제사장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시스템이 짜여 있었다.
여섯 개의 지류가 만나는 인더스강 상류는 축복받은 땅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태양은 사시사철 부드럽게 내리고 소들은 유유히 풀을 뜯는다. 동물 반 사람 반이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땅이지만 재앙은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우기가 되면 비는 사흘 밤낮을 내리퍼붓는다. 지류가 넘치고 인더스강이 넘치면 수마가 찾아왔다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나를 찾아온다. 가뭄이 들어도 마찬가지다.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짓지 못하고 가축들도 말라가며 사람들도 굶어 죽게 되면 나를 찾아온다. 전염병이 들어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이 너나없이 고열에 시달리고 설사에 축 늘어지고 하나둘 죽어 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찾아온다. 축복받은 땅이지만 재앙은 수시로 찾아온다는 걸 알기에 하늘의 축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제사장으로서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인간들만큼의 신들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중에 창조의 신과 파괴의 신과 유지의 신은 경배하고 또 경배해야 할 가장 위대한 신들이다.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들에게 끝없이 경배한다. 이 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신들은 우리를 위해 존재했다고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나는 신들의 대리인이면서 인간의 대표이기에 제사장으로서 늘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신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화를 내 우리를 재앙 속으로 떨어트릴 것이다. 매일 경건한 마음으로 신들에게 제를 올리고 경배하면 신은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내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신의 축복 속에서 배부르게 먹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자식들을 많이 낳아 기른다. 부족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가 퍼붓던 어느 날, 어린 소녀가 찾아왔다. 낡은 옷은 흠뻑 젖었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어린 소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 가여운 소녀는 금방 봐도 알 수 있는 하층계급의 천민이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어린 소녀가 늙은 남자에게 팔려 가서 매일 매를 맞고 살았던 흔적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죽을 것 같아 도망친 소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숨겨달라고 애원했다. 그런 소녀를 외면할 수 없어 나는 제단 뒤로 숨겨 주었다. 잠시 후 어깨까지 내려온 흰 수염의 늙은 남자가 왔다. 늙은 남자는 나에게 예를 갖추고 나서 소녀를 돌려 달라고 했다. 나는 늙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신들에게 바치는 시를 읊어 주었다.
이 우주 안에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다네.
증오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는 것이지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고 평등한 것이라네
선과 악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는 것이지
나와 신은 둘이 아니라 애초부터 한 몸이라네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알 수 있지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네
업을 만들지 말아야 윤회의 강을 건널 수 있지
네 안의 뱀이 깨어나야 신과 합일될 수 있다네
늙은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신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신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 인간도 신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늙은 남자는 신에게 진심으로 경배하고 참회의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늙은 남자가 돌아간 뒤에도 재단 뒤에 숨었던 어린 소녀는 여전히 두려움에 싸인 채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소녀를 불러 재단 앞에 세우고 소녀를 위한 기도를 했다. 마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사람들은 신에게 경배드리기 위해 제일 귀한 것들을 가져 와 재단 위에 바쳤다. 나는 위엄있고 존경받는 제사장이자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에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 기쁨은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자 신과의 약속이다. 신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신 안에 있다는 믿음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온갖 재앙과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진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신을 위한 대리인인 제사장이지만 인간을 위한 대리인의 역할을 더욱 신성하게 여긴다. 왜냐면 인간은 영원하지 않고 영원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근심 없이 사는 것이 영원보다 값지고 진리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 주셨다. 부드러운 바람과 따스한 햇볕과 풀을 뜯는 소들과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모두 신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모든 만물은 변하고 변한다.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돌며 우주를 떠도는 나그네다. 그러다가 어디에서 무엇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신은 모든 것들의 이름이다. 나는 오늘도 이 광활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에서 인간을 위해 신께 제사를 지낸다. 나는 위대한 이 땅의 제사장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