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자에게 복은 없다.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욕망의 대상은 부자다. 인생 최대의 목표가 부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느니 하는 말은 위로를 가장한 위선이다. 가난은 인격의 스승이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지만 가난은 걱정의 스승일 뿐이다. 가난이 인격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시대는 농경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농경시대다. 농경시대의 가난이 인격으로 커버될 수 있는 밑바탕에는 돈보다 글이나 철학이 인간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하면서 남에게 관대하기란 정말 어렵다. 가난은 결핍을 가져오고 결핍은 질투를 유발한다. 가난은 시간과 기회에서 불평등을 감수해야 하고 무능하다는 편견의 벽에 부딪혀 좌절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다 예수나 부처처럼 살지 못한다. 애초에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부자들이 적선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 가난한 사람은 같이 먹고 살자고, 공평해지자고 소리친다. 아니꼬우면 성공하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제 먹고살 만한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없는 집에선 학원 가고 유학 가서 스펙 쌓아 취직해야 가난이라는 계단을 한 발짝 올라설 수 있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올라서도 부자가 될 확률은 희박하다. 출발점에서의 불평등을 안고 가난의 사다리를 올라가지만 결국 자본주의가 버린 고아가 될지 모를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윌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무소유’를 쓴 법정스님 같은 자발적 가난을 즐겼던 사람들의 스토리는 그래서 작은 위로가 된다. 물질부자가 못 된다면 마음부자라도 되어 정신적 만족감으로 풍요로운 삶의 가치를 실현하리라고 마음먹어 보기도 한다.
원조 노숙자인 김삿갓은 자발적 가난을 택한 마음부자다. 한평생을 길에서 찬서리 된서리 맞으며 산 떠돌이 시인이다. 비참한 처지를 비관해 방방곡곡을 누비고 시를 지으며 자발적 가난을 즐겼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할아버지로 인해 인생무상을 일찍 알아버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삿갓을 쓰고 떠돌이가 되었다. 그가 어느 거리를 떠돌다가 밤이 되자 하룻밤 유숙할 곳을 찾았다. 그러나 초라한 그는 모두 거절당했다. 다행히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그를 받아줘 하룻밤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받아준 주인에게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위로의 시를 써서 주었다.
세상엔 돈만 많으면 다 신선이라네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가난이 죄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따로 있지 않은 것이니
부자도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도 부자 된다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부자가 신선처럼 사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신선처럼 못사는 사람이 죄가 있는 게 아니라 신선을 못 만들어준 가난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질타하는 것이다. 부자가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도 부자가 될 수 있으니 너무 서러워 말라는 메시지다. 돌고 도는 세상이니까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부자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가난을 미화하지도 않았고 부자를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잘 살면 신선처럼 살 수 있는 것이고 못살면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희망을 품으면 되는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
22세에 가출해서 57세로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는가. 천재적인 그가 거리의 시인이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이 닿는 데로 떠돌아다니며 기득권을 가진 양반들의 수많은 부조리도 봤을 것이고 가난하고 불쌍한 민초들의 고통도 봤을 것이다. 그의 시는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의 노래이며 풍자와 해학을 담은 인간 드라마인 것이다. 타의에 의해 좌절과 울분으로 자유인이 되었지만 떠돌면서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난 김삿갓은 ‘시’를 지으며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아우르는 법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방황으로 시작해 방랑으로 일생을 마친 위대한 자유인이다.
우리는 가끔 혼자 읊조리곤 한다. ‘아 더러운 세상 김삿갓처럼 살아야겠다’라고 하지만 정작 떠나려니 무섭다. 부모가 걸리고 자식이 걸리고 이것저것 옭아매는 것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개처럼 삶이라는 목줄에 매어 그렇게 살다가 간다. 그래도 용감한 사람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현대판 김삿갓이 되어 세계여행을 떠난다. 인생 뭐 있냐며 자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란 김삿갓이 살았던 그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몸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영혼도 자유롭지 못하다. 가진 게 없어도 마음으로 가진 게 너무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늘도 마음으로 가진 것도 내려놓고 김삿갓이 되어보는 꿈을 꾼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